너희가 친북의 의미를 아느냐? ②

어느 날의 일기 / 백화산에서

등록 2004.09.23 09:05수정 2004.09.23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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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좀 더 임전태세를 갖추는 듯한 형의 서슬이 좀 두렵기는 했지만, 대화를 끝내지 않고 계속 유도해 주는 뜻밖의 태도가 고맙기도 했습니다. 정말 고마운 마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당신네들 반북 반공밖에 모르는 사람들보다 친북하는 사람들이 몇 배로 고민도 많이 하고 힘들게 살아요. 당신네들은 곧잘 서울 한복판에 모여 인공기 불태우고 성조기와 태극기 휘날리며 주먹질에다가 악에 받힌 소리로 김정일과 친북 세력을 싸잡아 욕하기만 하면 되고 그것이 전부지만, 친북 세력의 친북은 간단하지가 않다구요.


우리는 정말 고민의 갈래가 참 많아요. 우리는 북한 체제의 야만성과 폭압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요. 북한이 세계 제일의 폐쇄 국가라는 사실에서 같은 민족으로서 부끄러움도 많이 느껴요. 그런 북한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평화통일의 길을 닦아야 할까?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회의와 번민 속에서 무수히 갈등을 겪기도 하지요. 그런 회의와 번민 속에서 결국은 다시 희망을 찾게 되고, 그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또 애를 쓰는 겁니다.

김정일이가 좋아서, 김정일의 전제독재를 도와 주기 위해서 친북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니건만, 김정일을 도와 주는 거라는 질타를 무수히 받아야 해요. 궁극적으로는 김정일을 압박하고 북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친북을 하고 북한 주민들을 도와 주려고 애를 쓰는 것인데, 매양 무조건 퍼주기라는 비판을 감수해야 해요.

갖가지 방법으로 북한 주민들을 도우려고 애를 쓰면서 실제로 그 손길이 북한 주민들에게 미치는 것인지 걱정도 해야 하고, 수구 반공 세력의 주장대로 그게 군량미로 조달되거나 김정일 체제를 돕는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것이 장기적으로는 우리에게 어떤 손익을 안겨 주게 될 것인지도 숙고와 고뇌를 하지요.

북한의 폐쇄적이고 주술적인 독재체제는 분명 타도의 대상이지만, 김정일 타도와 민족통일은 폭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전쟁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났어요. 전쟁이 아니라면 평화통일을 추구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평화통일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앞장서서 인내를 갖고 꾸준히 지속적으로, 그리고 갖가지 방법으로 노력을 해야 해요. 봄바람이 외투를 벗게 하고,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자연의 이치를 늘 생각해야 해요.

북한 체제의 붕괴를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에요. 설령 북한 권력층에 균열과 붕괴 현상이 생긴다 하더라도 엄청난 부작용과 후유증도 생각해야 해요. 그것보다는 서서히 북한 사회의 변화를 유도해 가는 것이 더 옳은 방법이에요.


북한 사회의 변화를 유도한답시고 친북 세력이 계속 설치게 되면 결국에는 김정일에게 이 나라를 내주게 될 거라는 당신들의 주장은 너무 얼토당토않은 망발이에요. 김정일의 적화통일 야망을 늘 경계해야 한다구요? 그러기 위해서는 국보법의 존속이 꼭 필요하다구요?

당신들은 이 나라가 그렇게 허약한 나라로 보입니까? 우리 국민들이 그렇게 철부지로 보이고 우습게 보입니까? 그 동안 우리 국민이 오랜 군사독재 치하에서도 꾸준히 민주 역량을 키워 오고 또 불의에 저항해 온 그 시민정신 같은 것들이 다 북한 김정일에게 붙을 수 있는 위험 요인으로 보입니까?


우리 국민의 민주 역량과 시민정신은 오히려 김정일의 세습 독재체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되는 겁니다. 북한 김정일 정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국민의 민주 역량과 시민정신입니다. 수구 반공주의보다 북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국민의 민주 역량과 합리적인 시민정신이니까요.

북한의 김정일 정권을 도와주는 것은 우리 친북 세력보다 오히려 당신네들 수구 반공 세력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랫동안 북한의 독재체제는 남한의 반공세력 덕을 보았고, 남한의 군사독재 정권은 북한의 세습 독재 덕분에 반민주 정권의 기반을 공고히 해오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일정 부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증오하고 타도를 외치면서도 서로서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시켜주고 유지시켜주고 있는 거지요.

마누라와 약속한 시간이 다 돼서 이만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낡아빠진 수구 반공의 기치로 계속 그렇게 북한의 김정일 정권을 도와주지 마십시오. 사실은 김정일 정권을 도와주는 구실을 하면서 나라 걱정을 하는 것은 심각한 모순입니다.

그 깊고 깊은 모순의 수렁에서 당신들이 하루 아침에 발을 빼기는 어렵겠지요. 나도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을 테니, 내 친북 성향을 비난하면서 균형을 지키라는 식의 괴상한 말은 하지 마십시오. 당신들부터 균형을 지키고, 친북이라는 말의 진정한 뜻을 확실하게 알란 말입니다. 그리고 나라를 걱정하는 척 능청을 떨면서 갖은 요설과 기만과 진실 왜곡으로 나라를 혼란 속으로 몰아가려는 수구 언론들의 작태에 그만 놀아나란 말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판단대로 친북 세력입니다. 김정일을 압박하고, 조금씩이나마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며 민족의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사람이기에 오히려 그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나는 그것을 시대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북한의 변화와 민족의 평화통일을 확신합니다. 왜냐, 나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고, 늘 그것을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이니까요!"

말을 마치고 나는 몸을 돌렸습니다. 고맙게도 형과 C사장은 나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C사장은 허리운동 기구 위에 올라서서 빠르게 발판을 돌리는 것 같았고, 형은 화가 난 탓인지 솔방울도 없는데 골프채로 휙휙 허공을 가르는 것 같았습니다.

화가 나서 형이 나를 붙잡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건 정말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더욱 고마운 건 형과 C사장이 내 열변을 참고 다 들어준 사실이었습니다. 나는 일순 내가 글쟁이인지 옛날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언뜻 들더군요.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습니다.

"김형, 그리고 최 사장, 내 얘기 끝까지 다 들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내 얘기가 다 끝난 건 아니에요. 아직 많이 남았어요. 다음에 또 만나요."

정말 나는 마음속으로 다음을 기약하면서 다시 몸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역사의 올바른 진행이란 늘 힘들기 마련이지만, 내 발걸음을 스스로 무겁게 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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