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의 가을 소식을 띄웁니다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36) 가을 편지

등록 2004.09.29 06:50수정 2004.09.2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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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뢰(松籟; 솔바람) 형에게


형이 지난 번 편지에 추석 전에는 꼭 귀국한다고 말씀하셔서, 며칠 전부터 집으로, 손전화로 여러 차례 다이얼을 눌렀습니다. 그러나 신호만 갈뿐 아무도 받지 않은 걸 보니 여태 귀국치 않으셨나 봅니다.

a 초가을 산길, 아직은 초록이 산을 덮고 있다.

초가을 산길, 아직은 초록이 산을 덮고 있다. ⓒ 박도

지금 우리는 ‘지구촌’시대에 산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국과 미국은 먼 나라이기에 마음대로 드나들기가 쉽지 않을 테지요.

미국에 사는 형의 아드님 댁으로 국제전화 번호를 누르려다가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 사연을 올립니다. 아직도 국제전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누를 만큼 제 생활이 습관화하지 않았고, 요즘에는 인터넷은 시공을 초월하여 전 세계로 전파되므로, 형이 어디에 계시든 이 편지를 쉬 받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여름, 캘리포니아 라스베이거스 근교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에서 형이 보내준 편지 잘 받고 답장도 못 드렸습니다.

지하 1,000 피트의 두터운 소금층 위에
뿌리를 내린 이름모를
자줏빛 꽃이 미풍에 파르르 떨며
나그네를 맞이하는 해발 -86 미터.


여름 철 최고 기온이 섭씨 58.3도나 되는
‘배드워터’에 괸 짜디짠 소금물에도
자그마한 물거미 같은 생물이 수면 위로 자맥질하는 생명의 경이.

2억 년 전 바다 밑이 솟아오르고,
5천년 전 소금물 호수가 물이 말라 돌소금의 마른 바다가 된 이곳.


황량한 자갈무덤, 물결처럼 구름진 거대한 흙더미 사이로
건너편 낮은 하늘에 희미한 낮달이 걸려 있다.

연 강수량 제로(2mm 미만) 지대로
9천년 전부터 인디언이 살았고,
골드러시 때(1849) 서부로 가던 개척자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붙여진 이름이
‘죽음의 계곡(Death Valley)’.

그곳 뜨거운 천연 한증막 속에
3천만 평방마일로 끝없이 펼쳐진
소금밭을 이국의 나그네가 맨발로 걷는,

아, 타는 목마름의 사랑이여!


형이 한국에 없으니 저는 마치 방향키를 잃은 배 같습니다. 형이 곁에 있을 때는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겨서 상의하면 저절로 풀어지기도 하고, 해결책도 쉬 찾을 수 있었지요.

형은 정말 심지(心志)도 굳고 크셨습니다. 지난 날 대부분 사람은 눈 앞의 부정부패 부조리에 시비선악도 가리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면서 힘 센 자가 던져준 북어대가리에 꼬리를 치면서 받아먹느라고 정신없었지요.

아니 배운 사람들이 더, 다른 이보다 더 많이 먹겠다고 권력자의 밑구멍까지 핥아주면서 더 힘차게 꼬리치는데, 형은 그런 삶을 분연히 거절하고 서울 도심 학교를 떠나 산업체 부설학교로 가서 가난한 노동자들의 스승이 되셨지요.

그 후 형은 산업체 부설학교마저 폐교되는 가시밭길을 걸으면서도 단 한 번도 어려움을 내색치 않았습니다.

가을 풍경을 담아 형에게 띄웁니다

a 길섶의 들국화

길섶의 들국화 ⓒ 박도

a 길섶의 꽃밭

길섶의 꽃밭 ⓒ 박도

저는 서울 생활을 접고 산촌으로 내려온 지 그새 6개월이 지났습니다. 나무도 어린 묘목 때 옮겨 심어야 뿌리가 잘 내리는데, 고목으로 그것도 생면부지의 곳에 뿌리를 내리자니 적잖은 고통이 따랐습니다.

애초의 생각보다 글 쓰는 일이 활발치 못합니다. 하지만 조급한 마음을 가진다고 될 일도 아니라서, 느긋하게 저 자신을 흐르는 세월에 띄우며 유유자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흐트러진 마음이 저절로 다잡아지기를 기대하면서.

오늘은 추석 명절이라고 찾아온 아이들을 떠나보낸 후 허전함을 달래고자 카메라를 메고 무작정 나섰습니다. 발길 닫는 대로 산길 들길을 거닐며 가을 풍경을 담아 먼 나라에 계시는 형에게 띄웁니다.

외국의 경치가 아무리 뛰어난들 내 나라 풍경과 견줄 수가 있겠습니까? 저도 그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봤지만, 우리 국토만큼 아름답고 정감이 가는 곳은 없었습니다. 우리 세대는 치즈나 버터보다 아무래도 된장과 김치가 더 좋은가 봅니다.

곧 고국에는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 것입니다. 올 가을 형과 함께 설악의 한계령 미시령 단풍 숲에 우리도 시뻘겋게 물들기를 고대해 봅니다.

송뢰 임무정 형, 만날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2004. 9. 29.
고국에서 아우 박도 올림

a 억새가 있는 가을 산길

억새가 있는 가을 산길 ⓒ 박도

a 가을 들길의 야생화

가을 들길의 야생화 ⓒ 박도

a 코스모스가 있는 가을 들길(1)

코스모스가 있는 가을 들길(1) ⓒ 박도

a 코스모스가 있는 가을 들길(2)

코스모스가 있는 가을 들길(2) ⓒ 박도

a 코스모스가 있는 가을 들길(3)

코스모스가 있는 가을 들길(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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