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둥이의 슬픔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37) 수세미를 거두면서

등록 2004.10.02 14:39수정 2004.10.02 18:01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늦은 가을볕에 자라는 늦둥이 수세미들

늦은 가을볕에 자라는 늦둥이 수세미들 ⓒ 박도

곧 서리가 내리는 계절


어제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방송에서는 온종일 이번 비가 그치면 내일부터는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질 것이라고 예보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강원 산간지방에는 서리가 내릴 것이라고도 했다. 서리가 내린다는 것은 화초나 농작물 등 대부분 일년생 식물이 그해 더 자랄 수 없음을 뜻한다.

오늘 아침은 더 없이 청명한 쪽빛 가을 하늘로, 예보대로 날씨가 쌀쌀했다. 날씨는 차갑지만 가을볕은 더 없이 좋았다. 바짝 서둘러 텃밭에 작물들을 거둬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집 어귀에 심은 수세미부터 마저 거둬들였다.

지난번에 따 둔 것과 오늘 거둔 것까지 합치니 모두 열 개나 되었다. 그 중, 두 개는 썩은 듯하여 버리고, 가장 충실해 보이는 것은 종자 감으로 하나 남겨뒀다. 모든 게 서투른 얼치기 농사꾼이라 막상 수세미를 거둬들이기만 했지 어떻게 부엌에서 쓰는 수세미로 만드는 줄은 몰랐다.

a 거둬들린 수세미들, 맨 왼쪽의 것은 종자 감

거둬들린 수세미들, 맨 왼쪽의 것은 종자 감 ⓒ 박도

마침 옆 집 작은 노씨가 와서 솥에다가 물을 끓여서 거기다가 푹 삶으면 껍질이 잘 벗겨지고 그걸 볕에다가 말리면 된다고 했다. 노씨의 말대로 양동이에 물을 끓인 후 거기다가 수세미를 넣고 푹 삶은 후 찬물에 넣고 껍질을 벗기자 뱀 허물 벗겨지듯이 잘 벗겨지며 하얀 수세미가 나왔다. 그 놈을 볕에다가 말렸다.

그런데, 수세미 줄기에는 아직도 여덟 개의 수세미가 더 달려 있다. 가장 큰 놈은 30여 센티미터 정도로 이 놈은 이제라도 따서 삶아내면 수세미로 쓸 수 있겠다. 다음 놈은 20여 센티미터로 한 열흘 더 자라야 수세미로 쓸 수 있겠다. 그 다음 놈은 10여 센티미터로 고추 크기만 하다. 그 나머지는 5개는 5센티미터 미만으로 한 달 이상은 더 자라야 수세미 구실을 할 수 있는 늦둥이들이다.


나는 이 여덟 개의 수세미들을 그대로 두고 관찰할 예정이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놈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제대로 자란 수세미가 되지 못하고 서리에 시들어 버릴 것만 같다. 특히 5센티 미만의 어린 수세미 열매를 보자 마치 쉰 살에 둔 늦둥이처럼 연민의 정이 갔다.

늦둥이에 대한 애정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피임법이 보급되지 않아서 부부가 생식 능력이 있는 한 자식을 낳았기에 여자들은 50이 되도록, 남자들은 좀 심한 경우 70까지 생남하기도 했다. 10대부터 낳은 아이를 50이 될 때까지 낳았으니 보통 가정에도 10여 명을 두는 경우도 흔했다.

그래서 며느리를 본 후에도 자식을 가져서 며느리가 시어미 해산 뒷바라지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내 초등학교 친구 가운데도 조카보다 나이가 어린 삼촌도 있었다.

늦게 낳은 자식은 '막둥이'이라 하여 부모들이 다른 자식보다 더 애지중지 키운다. 어쩌면 당신이 다 키우지도 못하고 세상을 뜰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불쌍하다고 젖도 매정스럽게 떼지 않고 심한 경우는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막둥이들에게는 젖을 물렸다.

나이 든 부모가 막둥이에게 더 정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인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의 능력이 쇠잔해지는 것을 빤히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낳아서 기를 때 부모로서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어린 자식에게 불쌍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사실 그 무렵에는 노인들이 환갑을 넘기고 사는 이가 드물었으니 막둥이를 다 키우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경우가 많았다. 모두들 가난한 시절이라 부모 유산이라도 제대로 있을 리가 없다. 형과 누나들은 제 자식 거두기도 빡빡한데 아무래도 막냇동생에 대한 사랑이 자식만큼이나 미치겠는가.

내 어머니는 늦둥이였다. 어릴 때 아명이 '끝임이' '끝순이'였다. 외할머니가 마흔이 넘어서 낳았다. 큰 이모와 어머니는 모녀처럼 나이 차이가 났다. 다행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오래 사셔서 늦둥이 시집간 것 다 보시고 외손자(필자)까지도 다 봤다.

그런데 잘 나가던 막내 사위가 기우뚱, 하루아침에 쓰러지자 막내딸의 친정출입이 잦았다. 늙은 부모로서는 이미 살림을 자식들에게 모두 물려준 터라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았겠는가.

내가 중학교 다닐 때 매 분기마다 학비를 얻으러 외가에 갔다. 돌아올 때 외삼촌이나 외숙모에게는 차마 학비 얘기는 꺼내지 못하고 외할머니한테 가서 훌쩍거렸다. 그러면 외할머니가 슬그머니 외삼촌에게로 가서 "걔 학비 낼 때가 된 모양이다"고 하시면 외삼촌이 나를 불러 손에 학비를 쥐어 주셨다.

그런 나를 떠나보내고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는 당신 마음대로 듬뿍 떼 줄 수 없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a 남은 가을볕에 어서 자라기를...

남은 가을볕에 어서 자라기를... ⓒ 박도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가을볕에 안간힘을 쓰며 매달린 수세미 열매를 애잔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가을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수세미에 늦둥이 내 어머니가 겹쳐서 눈시울을 적셨다.

그리고는 가위를 들고 수세미에게로 가서 남은 놈들이 잘 자라게 가장 큰 놈은 잘라 주었다. 나머지 일곱 늦둥이가 하루라도 빨리 영글기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