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보고 싶다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49) 옛 전우 김 일병

등록 2004.10.26 22:46수정 2004.10.27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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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에 밤이 드니


곧 보름이 다가올 모양이다. 산촌에서 바라본 달은 더없이 맑고 밝다. 전직을 속일 수 없다더니 시조 한 수가 흥얼거려진다.

산촌에 밤이 드니 먼 곳의 개 짖어온다
시비를 열고 보니 하늘이 차고 달이로다
저 개야, 공산 잠든 달을 짖어 무엇 하리오


이 시조는 '천금'이라는 기녀의 작품으로, 임을 기다리는 살뜰한 외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이 작품을 배우고 가르치던 시절에는 노래의 참 맛을 깨닫지 못하고 무조건 외기만 했다. 그런데 오늘 같이 달 밝은 산촌의 밤에 읊조리자 그리운 사람들이 새록새록, 밤하늘의 별처럼 떠오른다.

오늘 따라 옛 전우 김 일병이 떠오른다. 나는 학훈단 출신으로 대학 졸업 후 곧장 보병학교를 수료하고 전방 소총소대장 근무를 2년여 한 후 전역했다.

김 일병, 그는 충북 어느 두메산골 출신으로 고향에서 가까운 대학에 다니다가 드물게 전방 소총소대 소대원으로 입대한 친구였다. 소대장 생활을 하다보면 알게 되는데, 대체로 소대원의 학벌이 높을수록, 도시 출신일수록 눈치 빠르게 행동하고 빤질빤질 요령도 좋았다. 그러나 그는 학벌을 뽐내거나 잘난 척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a 1969년 겨울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서부전선 최북단,  강 건너 보이는 산이 북녘 땅이었다(왼쪽에서 세 번째 김일병, 네 번째 필자).

1969년 겨울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서부전선 최북단, 강 건너 보이는 산이 북녘 땅이었다(왼쪽에서 세 번째 김일병, 네 번째 필자). ⓒ 박도

그야말로 충청도 촌놈 티가 물씬한 순박한 친구였다. 키가 후리후리하게 크고 몸매가 가냘팠고 눈이 유난히도 크고 귀엽게 잘 생겼다.

전입 초, 그가 얼음을 깨고 소대원의 식기를 도맡아 닦는 것을 보면서 안쓰러운 마음과 괜찮은 친구로, 소대 소총수로는 아까운 인물로 여겼다. 그는 전혀 손(빽)을 쓰지 않아서 말단 소대 소총수로 온 것이었다. 그의 순박함과 청렴함에 더욱 마음이 갔다.


그 무렵에는 월남전이 한창이었다. 국군 파월 초기에는 비전투요원이었으나 차츰 월남전에 깊이 개입하여 마침내 수많은 전투요원이 파병됐다.

초기에는 서로 월남에 안 가려고 대부분 손을 썼지만, 많은 전투 수당과 귀국 때 가지고 오는 일제 카메라나 녹음기와 같은 외제품에 혹해 중반부터 한 밑천 잡겠다는 지원자가 많았다. 그러나 종반 무렵 전상자가 속출하자 서로 가지 않으려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때는 중반기로, 월남 지원자가 많았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연대 인사과에서 내려온 파월자 차출 명단에 김 일병의 이름이 있었다. 깜짝 놀라 그에게 물었다.

“제가 소대장님 몰래 연대 인사과로 가는 중대 행정병에게 부탁해서 파월을 지원했습니다.”
“왜?”
“제대 후 복학할 때 등록금 마련하려고….”
이미 엎지른 물이고 내가 그의 등록금을 마련해 줄 수도 없는 일이라 파월 지원을 막을 수도 없었다.

“김 일병, 몸조심해라. 죽으면 말짱 헛일이다.”
“네, 꼭 살아서 돌아올게요.”

며칠 후 그는 소대를 떠났다. 그뿐 아니라 많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월남의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 그들 중에는 자의로 간 친구도, 명령에 따라 간 친구도, 그 참에 외국 구경하러 가서 일제 카메라 메고 돌아오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많은 젊은이가 월남의 정글에서 생명을 잃거나 부상당했다. 그들의 핏값으로 국군 장비가 현대화되고, 경부고속도로가 뚫리고, 경제개발도 됐다.

반면 월남에서 돌아온 유골상자를 얼싸안고 몸부림치는 부모도 있었고, 전상금을 팽개치는 아내도 있었다.

“이 돈 필요없다. 내 아들 살려내라! 내 남편 살려내라!”

다시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남의 나라 전쟁터로 가는 일이 없기를 바랐는데 지금도 젊은이들이 남의 나라 전쟁터로 떠나고 있는 모양이다. 이 비극이 언제 끝날는지?

그때 김 일병 파월 후 이제까지 그의 후문을 듣지 못했다. 그는 살아서 돌아왔으리라.

이 밤 그가 보고 싶다. 나도 그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그도 별난 내 이름을 분명히 기억하리라. 그가 나의 글을 보고 쪽지함으로 전화번호를 보내줬으면 좋겠다. 날이 밝으면 통화 후 곧장 달려가서 그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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