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인기 화백
지금은 길이 넓어지고 아스팔트 포장까지 되어 승용차로 30분 정도 밖에 안 걸리지만, 당시는 비포장도로였고 양촌과 대전을 오고가는 시외버스도 자주 없었던 터라 꽤 먼 거리로 기억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고향 양촌에서 마친 나는 부모님의 남다른 교육열 덕분에 논산읍내도 아닌 대전시내에 있는 D고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81년 그때만 해도 이런 저런 사정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제법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도시로 나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행운아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웃음 밖에 나오지 않지만,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부여로 갔다 온 것을 빼놓고는 늘 걸어 다니거나, 기껏해야 자전거 정도만 타 본 시골뜨기가 처음으로 대전 가는 버스에 올랐을 때, 가슴 벅찬 기쁨도 잠시 차멀미를 견디지 못해 그만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말았다. 얼마나 황당하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는지, 이후로는 버스를 타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누구한테서인가 속을 비우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듣고는 아무 것도 안 먹고 귀밑에 멀미약까지 잔뜩 붙여보았지만 그럼에도 밀려오는 현기증과 부대낌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어느 정도 촌놈이었는가 하면 대전에 올라와 처음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 등 시내를 구경하고 돌아온 날, 마음은 터질 듯 환희의 도가니였지만, 대기오염에 갑자기 노출되었기 때문일까.
내 머릿속은 마치 산골에서 살던 물고기가 수돗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너무 어지럽고 아파서 밤새 잠 한숨 이루지 못하고 끙끙 앓아야만 했다.
그런데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멀미에 약하디 약한 내가 희한하게도 그녀를 본 이후로는 거짓말처럼 멀미 증세가 싹 가셨다는 것이다. 양촌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오다보면 연산이라는 곳을 간이역처럼 들른다. 그녀는 거기에서 버스에 오른 것 같다.
고1 때 6월쯤인가 멀미를 조금이라도 덜어보려고 5시나 6시쯤 가라는 어머니 말씀을 뒤로 한 채 그날은 서둘러 3시에 출발하는 차를 탔다. 확실히 한적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멀미가 걱정되어 억지로라도 눈을 붙였다. 잠을 잔 날은 그래도 멀미에 덜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이 올 리 만무했다. 그래도 눈은 감고 있어야 했다. 눈을 뜨면 속이 미식거려 금방이라도 멀미가 날 것 같아서. 얼마쯤 갔을까 버스 안이 어수선해 잠깐 실눈으로 보니 연산인가에서 몇몇 사람들이 버스에 내리고 오르고 하는 모습이 물안개처럼 들어왔다.
이내 눈을 감고 이제 잠이 오나보다 했는데, "학생!"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버스 차장이 승차권 검사를 하잔다. 잠을 자기는 틀렸다, 싶어 고개를 왼쪽으로 하여 팽이가 돌아가는 듯 하는 이마를 손으로 짚고 창 밖으로 시선을 꽂았다.
계절이 신록에서 청록으로 옷을 바꿔 입고 있었다. 죽은 것만 같은 검은 나뭇가지와 땅에서 고사리손 같은 새싹이 돋아 햇빛을 먹으며 싱그럽게 반짝이더니 점점 녹음방초(綠陰芳草)로 달라져 가는 산천초목을 보면서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에 살 때는 매일 접하는 산과 들이라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지 못했는데, 대전으로 오고부터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시외로 나오니 계절이 성큼성큼 변화하고 있음을 달력의 사진이나 그림 보듯 읽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