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2회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1 - 큐피드의 화살

등록 2004.11.18 15:29수정 2005.01.03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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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녀를 만난 것, 아니 처음 본 것은 고교 1학년 때였다. 그때 나는 대전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한 달에 한 번 꼴로 시골집을 다녀오곤 했다.

나의 시골집은 충남 논산 양촌이다. 논산하면 흔히 우리 나라 남자들은 논산훈련소를 생각하는데, 군대와는 거리가 좀 있는 곳이다. 또 논산하면 옛 이름이 '놀뫼'라서 평야지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란 양촌, 일명 양지뜸(햇빛촌)은 사방팔방 높고 낮은 산들이 올망졸망 병풍처럼 둘러져 자유롭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형상이다.


남한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대둔산과 신령스러운 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계룡산이 팔을 길게 내밀어 서로 새끼손가락을 걸고 있는 자락에, 물 맑고 인심 좋은 내 고향 양지뜸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림 김인기 화백
지금은 길이 넓어지고 아스팔트 포장까지 되어 승용차로 30분 정도 밖에 안 걸리지만, 당시는 비포장도로였고 양촌과 대전을 오고가는 시외버스도 자주 없었던 터라 꽤 먼 거리로 기억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고향 양촌에서 마친 나는 부모님의 남다른 교육열 덕분에 논산읍내도 아닌 대전시내에 있는 D고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81년 그때만 해도 이런 저런 사정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제법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도시로 나가 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행운아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웃음 밖에 나오지 않지만, 중학교 때 수학여행을 부여로 갔다 온 것을 빼놓고는 늘 걸어 다니거나, 기껏해야 자전거 정도만 타 본 시골뜨기가 처음으로 대전 가는 버스에 올랐을 때, 가슴 벅찬 기쁨도 잠시 차멀미를 견디지 못해 그만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말았다. 얼마나 황당하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는지, 이후로는 버스를 타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누구한테서인가 속을 비우는 것이 좋다는 말을 듣고는 아무 것도 안 먹고 귀밑에 멀미약까지 잔뜩 붙여보았지만 그럼에도 밀려오는 현기증과 부대낌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어느 정도 촌놈이었는가 하면 대전에 올라와 처음 홍명상가와 중앙데파트 등 시내를 구경하고 돌아온 날, 마음은 터질 듯 환희의 도가니였지만, 대기오염에 갑자기 노출되었기 때문일까.


내 머릿속은 마치 산골에서 살던 물고기가 수돗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너무 어지럽고 아파서 밤새 잠 한숨 이루지 못하고 끙끙 앓아야만 했다.

그런데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멀미에 약하디 약한 내가 희한하게도 그녀를 본 이후로는 거짓말처럼 멀미 증세가 싹 가셨다는 것이다. 양촌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오다보면 연산이라는 곳을 간이역처럼 들른다. 그녀는 거기에서 버스에 오른 것 같다.

고1 때 6월쯤인가 멀미를 조금이라도 덜어보려고 5시나 6시쯤 가라는 어머니 말씀을 뒤로 한 채 그날은 서둘러 3시에 출발하는 차를 탔다. 확실히 한적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멀미가 걱정되어 억지로라도 눈을 붙였다. 잠을 잔 날은 그래도 멀미에 덜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이 올 리 만무했다. 그래도 눈은 감고 있어야 했다. 눈을 뜨면 속이 미식거려 금방이라도 멀미가 날 것 같아서. 얼마쯤 갔을까 버스 안이 어수선해 잠깐 실눈으로 보니 연산인가에서 몇몇 사람들이 버스에 내리고 오르고 하는 모습이 물안개처럼 들어왔다.

이내 눈을 감고 이제 잠이 오나보다 했는데, "학생!"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버스 차장이 승차권 검사를 하잔다. 잠을 자기는 틀렸다, 싶어 고개를 왼쪽으로 하여 팽이가 돌아가는 듯 하는 이마를 손으로 짚고 창 밖으로 시선을 꽂았다.

계절이 신록에서 청록으로 옷을 바꿔 입고 있었다. 죽은 것만 같은 검은 나뭇가지와 땅에서 고사리손 같은 새싹이 돋아 햇빛을 먹으며 싱그럽게 반짝이더니 점점 녹음방초(綠陰芳草)로 달라져 가는 산천초목을 보면서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에 살 때는 매일 접하는 산과 들이라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지 못했는데, 대전으로 오고부터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시외로 나오니 계절이 성큼성큼 변화하고 있음을 달력의 사진이나 그림 보듯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림 김인기 화백
그렇게 얼마를 창으로 달려드는 계절 풍경과 보리를 베어내고 모내기에 한창인 농부들의 모습에 취해 있었을까. 그러는 사이 벌써 양정을 지나고 있었나보다. 참고로 말하면 양촌에서 시외버스를 타면 연산과 양정 두 곳을 거쳐 대전에 도착한다.

양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탔는지 몇 명이 입석으로 가고 있었나보다. 그 중 한 할머니가 내 자리 옆에 서 있었던 모양인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으니.

직감적으로 무언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여긴 나는 머리를 바로 하고 상황 파악을 한 다음 얼른 자리를 양보하려고 일어서려는데, 뒷좌석에 있는 여학생이 "할머니! 이리 앉으세요" 하면서 먼저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할머니는 고맙다고 하면서 그 여학생 자리에 앉았다. 나는 본의 아니게 노인에게 양보하기 싫어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무례한 또는 얌체족으로 낙인찍힌 셈이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 얼굴이 화끈거려 나도 몰래 일어나고 말았다.

"여기, 앉으시죠."

나는 나 대신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한 그 여학생에게 내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면서 한사코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도로 앉고 말았다. 앉고 나서 정신을 차린 다음 그녀를 힐끗 한 번 올려다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나는 입과 몸이 동시에 굳어져 잠시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청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가 찾던 이상형이었다. 옛날 이야기 속의 선녀, 동화 속의 공주가 내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첫 눈에 반한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갑자기 가슴 속에서 파열음이 들리더니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자꾸만 떨리는 가슴을 손으로 억누르며 도둑고양이처럼 살짝 그녀를 한 번 더 엿보았다.

두 갈래로 곱게 땋아 리본으로 정갈하게 묶은 머리, 계란형의 얼굴에 새하얀 피부, 그리고 샘물 같은 보조개, 어림잡아 165센티미터 정도의 키와 날씬한 몸매….

한 떨기 아름다운 백합! 그래 그녀는 청초한 이슬을 머금은 한 송이 백합화였다. 초록색 교복으로 보아 C여고 학생임이 분명했다. 혹시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싶어 가슴 쪽으로 시선을 옮겼으나 명찰은 주머니 속에 이름을 파묻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그녀와 그만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숨이 멎는 것만 같아, 얼른 그녀의 시선을 피해 창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점점 거세지는 박동소리와 이글거리며 대지로 쏟아지는 태양처럼 뻘겋게 달아오르는 두 뺨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그녀와의 첫 만남 이후로 신기하게도 멀미 증세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버스 타는 새로운 즐거움이 생겼다.

버스가 연산에 정차할 때마다 내 가슴은 괜시리 콩닥거렸고 시선은 문 쪽에 고정되었다. 그 후로 운 좋게 두 번 정도 그녀를 볼 수 있었으나 전처럼 가까이에서 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와 같은 버스를 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기분은 하늘을 날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다 고2 가 되었다. 3월 중순쯤이었을까.

김형태

* 3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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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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