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3회(1부 : 큐피드의 화살)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4.11.24 10:38수정 2005.01.03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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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그러다 고2 가 되었다. 3월 중순쯤이었을까. 그 날도 시골집에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혹시나 하고 잔뜩 기대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감사하게도 연산에서 그녀가 차에 올라타는 것이 아닌가. 그녀를 보는 순간 내 가슴은 돌을 삼킨 호수처럼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빈 좌석이 없었는데, 마침 그녀가 내 쪽으로 가까이 왔다. 일어날까 말까 일어날까 말까 많이 망설이다가 어렵게 용기를 내어 자리를 양보하고자 사시나무 떨 듯 후들거리는 다리로 불안하게 일어서긴 일어섰는데 너무 긴장한 탓에 입이 굳었는지 앉으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녀도 수줍은 얼굴로 눈치만 살필 뿐 앉으려 고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있을 때 한 뚱뚱한 아주머니가 빈자리가 있음을 보고 재빨리 달려와 앉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몰라도 손을 입에 가져다대고는 살짝 웃고 있었다. 막 세안을 끝낸 것 같은 깨끗한 얼굴에 번지는 해맑음이 모자리자의 미소, 그것이었다.

버스가 대전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흔들거리며 옆에 있었지만 나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가끔씩 그녀의 얼굴을 눈길로 훔쳤다. 어쨌든 그녀와 나란히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너무 황홀했다. 비포장도로를 쿵쾅쿵쾅 밟으며 신나게 달리는 버스만큼이나 내 심장도 덩달아 요동치고 있었다.

얼마 후 버스는 서부정류장에 도착하여 호흡조절을 하고 있었으나 내 심장 박동은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점점 가속 페달을 밟고 있었다. 그녀가 시외버스에서 내려 시내버스로 갈아탔다. 나도 무조건 그녀를 따라 탔다. 타고 보니 다행히 나와 방향이 같았다. 잘 되었다 싶었다. 그러나 바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따라 타기는 탔지만 이제부터 어떻게 하여야 하나….

그녀가 나보다 먼저 내릴지 나중에 내릴지 그것도 알 수 없고‥‥‥. 그거야 중요하지 않고 그녀가 내릴 때 따라내려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이왕 따라나선 김에 따라 내리자, 따라 내려서는 뭐라고 하지,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어머니께서 잔뜩 싸주신 저 짐들은 어떻게 하지, 가지고 따라나서 아니면 놓고 따라나서‥‥‥.


이렇게 내 머리가 바람을 뒤집어 쓴 풍차처럼 제멋대로 돌아가고 있을 때 그녀가 동중학교 앞에서 내리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도 마음만 앞섰지 다리가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녀를 그만 놓치고 만 것이다.

자취방에 돌아온 나는 문자 그대로 후회막급이었다. 따라 내리는 건데, 따라 내리는 건데, 보따릴 집어 던져 놓고라도 따라 나서는 것인데, 내가 말을 못 붙이더라도 뒤따라가다 보면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넬 수도 있지 않은가!


내성적인 나의 성격을 탓하며 어머니께서 정성스럽게 싸준 쌀이며 밑반찬이 든 짐들을 팽개치듯 내던지고, 그것도 부족해 발길로 몇 번 툭툭 차버렸다. 이것만 아니었어도……. 애꿎은 짐들만 탓하고 있었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방바닥에 그대로 벌렁 누워버렸다.

연탄불이 꺼졌는지 얼음장 같은 한기가 어둠처럼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천장에 그녀의 얼굴이 가을날 고추잠자리처럼 맴돌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귀티 나는 샹들리에처럼 우아하게 그네를 타는 아름다운 모나리자의 미소로 그녀가 달려들고 있었다.

얼른 눈을 뜨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골목을 쏜살같이 빠져나와 인근 동광학교 운동장을 물방개 돌 듯 돌고 돌고 또 돌았다.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정말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별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지친 몸을 끌고 수돗가로 갔다. 찬물을 마구 끼얹었다.

그러나 그 찬물도 나의 열기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피한다고 될 게 아니다 싶은 나는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큐피드의 화살에 맞은 게 분명했다. 난생 처음으로 찾아온 사랑을 이대로 구겨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편지로라도 내 마음을 전하는 거야' 그렇게 마음을 먹자 없던 힘이 저절로 생겨났다.

성도 이름도 모르는 ㅇㅇ에게

개나리 노랑 저고리 입었다
청맹과니 대낮에
어두움을 밝히기 위하여
진달래 빨간 숯불 피웠다
부엉이 산천에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버들가지 파릇파릇 물이 올랐다
벙어리 냇가에
물소리 나게 하기 위하여

아 여기저기서 움트는 소리
미물들도 기지개를 켠다

------------------------------

황명걸 님의 <봄산천>이라는 시(詩)입니다.

정말 이 시처럼 봄의 여신이 춥고 어둡고 기나긴 겨울산을 넘어, 목련빛 새하얀 얼굴에 개나리색 노랑저고리, 그리고 진달래꽃 분홍치마를 둘러 입고 샛바람과 함께 어느새 우리들 곁에 성큼 와서 생명의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제 살아있는 모든 것은 잠에서 깨어나 앞 다투어 사랑의 잔치, 봄의 향연을 마련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봄은 참으로 생명의 계절입니다.

먼저 양해도 구하지 아니하고 펜을 든 저의 무례함을 너그러이 용서하십시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대(어색하지만 이름을 몰라 이렇게 부르니 양해바랍니다) 앞에 서면 입과 발이 얼어버려 도저히 말을 건넬 용기가 나지 않아 이렇게 편지로 제 마음을 대신 전하고자 하니 바다같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제가 처음 그대를 본 것은 작년 6월이었습니다. 저는 집이 양촌인데 한 달에 한 번 꼴로 집에 다녀오곤 합니다. 대전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그대를 처음 보는 순간 저는 그만 바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첫눈에 그대에게 반한 것이지요. 분명 그때 큐피드의 화살에 맞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후로 일부러 시골집에 자주 내려갔습니다. 물론 그대를 보고 싶어서였지요. 그러나 그대를 볼 수가 없었어요. 겨우 두 번을 보았을 뿐입니다. 운 좋게도 그대를 만난 날, 용기가 없어 말을 건네지는 못했지만 같은 버스를 타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러다 아주 오랜만에 오늘 그대를 다시 보았습니다. 정말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더군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에게 말을 건네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내성적인 성격 탓으로, 아니 그것보다는 그대만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떨리고 얼굴이 달아오르며 다리까지 후들거려, 한 마디 못하고 그대를 그냥 보내고 말았습니다. 바보 같은 저를 얼마나 탓했는지‥‥‥.


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이 일시적 감정인가 해서 떨어버리려 무진 애를 써봤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공부를 하려고 책을 펴도 온통 그대 얼굴뿐이고, 잠을 자려고 누워도 온통 그대 생각뿐입니다. 저의 이러한 가슴앓이를 낫게 해주실 사람은 오직 그대뿐입니다.

제가 싫지 않다면 이 글을 읽는 대로 연락을 주십시오. 좋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친구가 어려우시면 펜벗도 괜찮습니다. 부디 저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하지 마시고, 꼭 소식을 주십시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저는 양촌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거기서 중학시절까지 보냈고, 지금은 대전 D고교 2학년에 재학 중인 김철민이라고 합니다. 저의 장래희망은 작가 또는 목사님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책을 읽거나 쓰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또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음악이란 음악은 모두 좋아합니다. 요즈음은 기타를 배우고 있습니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언제 저에게 연주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대를 위한 노래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소식이 있기를 학수고대하며 총총난필로‥‥‥.

끝으로 저의 졸시 <안경처럼>을 들려드리며 이만 펜을 놓겠습니다.

1982년 3월 14일

그대로 인해 가슴앓이 하는 철민 씀

-----------------------------

나는 너의 눈이고 싶다
늘 곁에 있어도 없는 것 같은
그림자가 눈부신
그런 창이고 싶다

낮달처럼 콧등에 앉아
나를 잃어 너를 돋우는 빛,
열매를 위하여 치마를 내리는
그런 꽃이고 싶다

별이 크게 눈을 뜨는 시간에는
너를 지켜보며 지켜주는 눈썹의 키작음으로
밤새워 이슬 맞는 허수아비의 깨어짐으로 깨어있는
그런 파수꾼이고 싶다

나는 너의 참사랑이고 싶다
보이지 않는 오롯함으로 너의 눈이 밝아진다면
열 번 금이 가고 깨뜨려져도 순수로 남는
그런 유리알이고 싶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며 내 딴에는 있는 정성 없는 정성 다 들여서 꽃 편지지에 곱게 곱게 수를 놓듯 글을 써 내려 갔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식 날 죽마고우 용석이가 행운의 선물로 준 '네잎 클로버'도 아낌없이 동봉했다.


- 4회에서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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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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