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4회(1부 : 큐피드의 화살)

-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4.11.27 08:13수정 2005.01.07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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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 화요일.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친구 자전거를 빌려 타고, 그녀가 내린 동중학교 앞 버스정류장에 바람처럼 도착했다. 그리고는 정차하는 버스마다 혹시 그녀가 내리는가 싶어 눈을 크게 열고 기다렸다.

봄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전날부터 불어 닥친 꽃샘 추위에 날까지 저물고 보니 제법 쌀쌀했다. 그러나 추운 줄도 모르고 설레는 가슴을 안고 그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녀가 내리면 어떻게 할까? 솔직히 말을 건넬 용기는 없고‥‥‥ 그냥 무조건 따라가자.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넬 때까지, 그녀가 말을 건네면 그때 말하자‥‥‥. 끝까지 그녀가 말을 걸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할까? 그때는 우편함, 또는 그녀의 방 앞에 편지를 놓고 오자.'

김형태
나름대로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마냥 기다렸지만, 그녀는 여전히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분명 이 정류장에서 내렸는데 이상하다.' 나는 저녁을 안 먹었지만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12시까지 기다린 나는 첫날은 그쯤에서 일단 철수하기로 하고 다음 날을 기약했다.

수, 목, 금. 내리 3일을 거의 새벽 1시까지 기다렸지만, 그녀의 모습을 꿩 구워 먹은 자리였다. 목요일까지만 해도 풍선처럼 희망으로 부풀었던 내 가슴이 금요일 밤에는 기운이 빠지면서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멋지게 보이려고 교복을 벗어 던지고 안집 형의 옷을 빼앗다시피 해서 입고 나온 노란색 티셔츠에 흰색 봄 점퍼, 그리고 연두색 바지. 한기가 황소바람처럼 내 몸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1시까지는 기다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조금 떨어진 레코드 가게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추위를 쫓았다. 그때 따라 불렀던 노래 중의 하나가 홍삼트리오의 '기도'였다.


"아아아아 아아아아 그리움에 불러보는 아픈 내 가슴속에 맺힌 그녀 나 언제나 한숨 지며 그리워질 때 성모 앞에 드리는 기도 내 님의 소식 전해 주소서 아 가버린 님 언제나 오시려나 그리워 지친 마음 오늘도 기다리네 아아아아 기다리네"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울컥하고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소매로 닦고 또 닦았다. 터벅터벅 집에 돌아오면서 이제 그만 하자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상하게 오기가 발동했다.


정성 들여 쓴 편지가 아까워서였을까? 밤을 밝히며 기다린 나흘이 가뭇없어서였을까? '사내 대장부가 칼을 뽑았으면 썩은 호박이라도 찔러야지 그냥 빈 칼을 도로 칼집에 넣을 수는 없지' 이런 생각이 들면서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모험을 하기로 하였다.

토요일. 3교시를 마치고 난생 처음 조퇴라는 것을 했다. 담임 선생님께는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편찮으시다고 둘러대고. 역시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생님께 거짓말이라는 것을 해봤다. '사랑이 무섭긴 무섭구나. 나로 하여금 거짓말까지 하게 만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교문을 나서자마자 택시를 잡아탔다.

"아저씨, C여고요! C여고로 가주세요, 빨리, 빨리 좀요!"하고 기사 아저씨를 재촉했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타보는 택시였다. 그녀 덕분에 촌놈이 택시까지 타보고, 어쨌든 그 날은 내 인생에 있어 새로운 기록으로 풍성한 날이었다.

C여고는 언덕, 아니 산 중턱에 있는 학교였다. 택시에서 내려 장미꽃 한송이를 사들고(장미꽃을 돈 주고 사보기도 이날이 처음이었다) 5백m쯤 걸어 올라가니까 교문이 보였다.

차마 교문 앞에서는 기다릴 수가 없어서 조금 떨어진 길 가장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윽고 여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명씩 나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개미떼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눈을 뒤집고 쳐다봐도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더군다나 머리 모양부터 교복, 신발까지 똑같은데 그곳에서 그녀를 찾는다는 것은 해변에서 바늘을 찾는 격이었다. 힐끗힐끗 쳐다보는 여학생들의 시선이 따가워 더 이상 서있을 수도 없었다.

자꾸만 뒤로 물러서는 사이에 썰물처럼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말았다. '역시 무모한 게임이었구나.' 나는 스스로를 책망하며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섬광처럼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택시를 타고 다시 한번 동중 앞에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녀보다 먼저 가서‥‥‥'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탓하며 얼른 택시를 잡아타고 동중 앞에서 내렸다. 다시 기다림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번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관절 어찌된 일인가? 대체 그녀는 하늘로 솟았는가? 땅으로 꺼졌는가?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레코드 가게에서는 김창완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영가가 구슬퍼---"

너무도 슬픈 곡조였다. 노래는 내 몸에 파고들어 나를 울리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기타처럼 또는 바이올린처럼 악기가 되어 울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그만 장미꽃을 떨어뜨렸다.

주울까 하다가 그냥 갔다. 길을 건너 뒤를 돌아보니 무수한 차들이 그 꽃을 밟고 지나가고 있었다. 금세 장미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꼭 내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시렸다.

동중학교 안으로 들어가 플라타너스 나무에 기대어 한없이 울었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울었다. 소리는 내지도 못하고 몸으로 한참을 그렇게 흐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고 덩그란이 나 혼자만 버려져 있었다. 벌써 어둠이 학교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가기는 가야겠는데 힘이 빠져 걷기조차 힘들었다. 자꾸만 걸음이 헛디뎌지고 다리가 꺾여졌다.

그냥 털썩 주저앉아 그렇게 또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어떻게 다리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용케도 자취방까지 오기는 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울음이 복받쳐 올랐다.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울었다. 목놓아 마음껏‥‥‥ 역시 난생 처음으로 많이 울어본 날이었다. 그렇게 실컷 울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나와 인연이 없는 거야, 아니 내가 여자를 만날 때가 아직 덜된 거야' 그렇게 마음먹기로 하였다. 그녀에게 보내려던 편지를 찢었다. 그리고 공터로 가서 불태워버렸다. 그러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부모님께서 그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공부하라고 대전으로 보냈는데, 저는 이렇게 다른데 정신이 팔려 여러 가지로 어리석은 짓을 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도 부족한 이 때에 한가하게 여학생이나 사귀려고 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짓입니까? 이제라도 정신 차리게 해주십시오. 제 주제에 무슨 여학생입니까? 이제부터는 단단히 마음먹고 공부에만 전념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이후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시골집에 다녀올 때면 혹시 연산에서 승차하지 않을까 해서 기대감에 부풀기도 했지만 번번이 물거품처럼 무산되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 한번도 그녀는 다시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나의 뇌리 속에서 그렇게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었다.

"땡땡땡---" 끝종이 울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아----"

"아쉬워하긴 녀석들‥‥‥ 평소에 수업을 이렇게 열심히 들으면 너희들 모두 수석하겠다."

"선생님, 설마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요?"

영숙이가 손을 들며 물어왔다.

"글쎄, 더 있을까? 없을까?"

"더 있습니다."

이번에는 서진이가 일어서면서 자신 있게 대답한다.

"어떻게 알았어?"

"선생님께서 방금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하셨잖아요. 그 말은 이야기가 계속된다는 뜻 아니에요. 저희 언어능력을 너무 우습게보지 말라고요."

"그런가? 그럼 속편을 기대해 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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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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