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골짜기 헤매 건진 환장할 그 맛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80]토끼, 꿩, 민물고기회

등록 2004.12.08 10:12수정 2004.12.08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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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머리 위로 들어 치고, 메로 힘껏 내리치면 고기가 깜짝놀라 기절을 한다. 한쪽에선 먹느라 바쁘다. 초고추장에 입술이 부르트겠다.
돌을 머리 위로 들어 치고, 메로 힘껏 내리치면 고기가 깜짝놀라 기절을 한다. 한쪽에선 먹느라 바쁘다. 초고추장에 입술이 부르트겠다.김용철

겨울 수렵이 즐겁다


겨울에도 천렵(川獵)을 한다. 수렵(狩獵)도 빠질 수 없다. 아이들만의 잔치일 때도 있고 온 식구가 넉넉히 배를 채우기도 하며 술꾼들의 안줏감으로 그만이었다. 어른들 옆에서 한 점 얻어먹으려고 눈치 보며 '뽀작거린' 아이들 숱하게 많았다.

연날리기, 썰매타기, 팽이치기, 비료부대로 눈썰매타기를 즐기던 아이들은 추운 줄도 모르고 들로 산으로 쏘다녔다. 날이면 날마다 나무하러 가지만 꼴을 베어야 하는 수고에서 한 짐 덜었고 눈이나 비가 오면 일손 놓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고구마 먹고 싱건지(동치미)나 축내니 차라리 밖으로 나가 사냥을 즐기고 덤으로 쫄깃한 고기 맛을 보니 이보다 좋을 수 있겠는가.

형과 어렸을 때 손 찔려가며 얼마나 많은 철사를 구부렸는지 모른다. 해마다 올무를 만들기 위해 초겨울에 철사를 따로 사왔다.
형과 어렸을 때 손 찔려가며 얼마나 많은 철사를 구부렸는지 모른다. 해마다 올무를 만들기 위해 초겨울에 철사를 따로 사왔다.김용철

토끼 몽매 만들고 눈밭 몰이에 나서다

밤새 철사를 오그려 토끼 덫 몽매를 만들어 산길에 놓고 추적추적 가랑비나 진눈깨비가 오길 기다리면 산모롱이에서 뭉그적거리며 내려오다 잿빛 토끼 한 마리 '깨꼴랑'한다. 운수 좋은 날은 나뭇짐이 무겁도록 서너 마리를 지고 내려올 때도 있다.

토끼몰이도 즐겁다. 큰 눈이 오면 동네 청년들과 아이들은 장화나 고무신을 새끼줄, 고무줄로 단단히 묶고 몽둥이 하나씩 들쳐메고 뒷골로 향한다. 허리춤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에 한 줄로 쭉 늘어서 발걸음 조심조심 숨죽여 꼭대기까지 간다.


늘 가보지만 작전은 벌써 산 아래서 마쳤다. 협곡을 향해 위에서 아래로 몰아세우면 쫑긋하던 토끼 혼비백산! 골짜기가 떠나갈 듯 함성을 지르며 아래로 쫒으면 앞다리가 짧아 쉬 뒹굴고 마니 고꾸라지기를 몇 번 하다보면 젊은이들 기세에 눌려 옴짝달싹 못하게 되니 누군가 몽둥이 한 방에 그걸로 노획물이 되었다.

너덧 근이나 되는 '묵치'(덩치가 큰 짐승) 하나 걸리면 호랑이 껍질 벗기듯 코 아래 인중에 열십자(+)를 긋고 쭉쭉 벗겨나가면 홀라당 분리가 된다. 토끼털로 귀마개를 만드려면 며칠만 말리면 좋기도 하거니와 무쇠 칼로 토막토막 잘게 썰어 생강, 마늘 넣고 주물럭주물럭 주물러놓고 무채를 도톰하게 썬다.


매콤한 고추 썰고 고춧가루 듬뿍 쳐 달달달 끓이면 시큼한 토끼고기 잔치다. 술 한잔 턱 털어 넣으면 좋으련만 어른들이 부러웠다. 후후 불며 국물 반, 고기 반 성찬이 따로 없다.

콩이나 까치밥(찔레열매) 너덧 개 놓아두면 꿩이 멀리 날지 못하고 퍼득퍼득 땅을 기었다.
콩이나 까치밥(찔레열매) 너덧 개 놓아두면 꿩이 멀리 날지 못하고 퍼득퍼득 땅을 기었다.김용철

싸이나 콩에 넣고 농약 묻혀 밭가에 두고 달음박질로 장끼와 까투리 사냥

토끼 사냥 못지않게 꿩 사냥은 정성이 들어간다. 김제나 나주평야는 눈밭에 벼 알 주워 먹으러 쏘다니는 꿩이 표적이다. 아이들은 무작정 지평선이 보이는 들로 나갔다. 혼자도 좋고 서너 명만 있어도 가능한데 앞만 보고 날고 기어가는 꿩을 잡는 비결은 간단하다.

속으로 '하나 둘 셋!' 숫자를 세고는 앞만 보고 꿩 꽁무니를 따라 마구 뛴다. '푸드덕' 한 번 날면 쉬지 않고 달린다. 가까워지면 또 날아간다. 길어봐야 80m 이내다. 다시 뛰고 멈추기를 반복하면 필시 꿩은 몸이 무거워 눈밭에 머리를 박고 오리가 자맥질하듯 발을 동동구리며 허우적대는 원시적 사냥의 전형이다.

내 고향 백아산(전남 화순 북면에 소재, 810m. 마당바위와 빨치산의 고장)이나 지리산에서는 사뭇 다르다. 형제끼리 호롱불 켜놓고 작업을 하는데 못 대가리를 쳐버리고 납작하게 송곳을 만들어 콩알을 하나하나 뚫어야 한다. 하얀 '싸이나' 수산화나트륨 나눠 넣고 촛농으로 밀봉하거나 냄새가 없는 농약-다이아매크론에 서너 시간 담갔다가 눈 녹은 밭가에 서너 개씩 뿌려놓으면 새하얀 눈밭에 찬란한 벼슬과 부리, 총천연색 무지갯빛 장끼나 까투리 획득했다.

사나흘 지나 나무하러 갈 때 자신이 놓아둔 자리 주위를 돌아보면 내장에서 촛농이 녹고 독이 퍼져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푸드득 푸드득 꼬꾸라진다. 욕심쟁이는 쥐덫 채기를 놓아서 잡는 수도 있었다.

그때는 맹독성 농약인들 독극물인들 가리지 않고 내장을 버리고 토끼탕과 다름없이 참기름 넣고 자작자작 볶아서 두고두고 먹는다. 떡국이나 무국, 미역국, 토란국 따위 맑은 국 끓일 때 빠지지 않았으니 꿩고기를 닭에 비교하면 서럽다 한다. '꿩 대신 닭'이란 떡국이나 만두소 기본 재료가 되었으니 그 맛을 어찌 따지겠는가.

새총을 들고 감나무자락에 붙어 있는 참새 괴롭히고 연기 통 부대자루로 막아 굴뚝새나 뱁새 한두 마리 건지기도 했고 성냥골과 사금파리, 차돌, 유리를 깨서 우산대 기다랗게 총구로 대신하고 국방군과 빨치산의 처절한 전투 끝에 탄피 즐비했으니 사제 총 만들기는 중학생이면 어렵지 않았다. 산탄이 고라니, 노루 다리에 맞아 절면 한 마리 질질 끌고 오는 일도 있었다.

청정지역에서 아직 살고 있는 고기는 디스토마가 있긴 하지만 한번 먹어볼만한 별미다. 종류별로 있을 건 다 있다.
청정지역에서 아직 살고 있는 고기는 디스토마가 있긴 하지만 한번 먹어볼만한 별미다. 종류별로 있을 건 다 있다.김규환

쇠메와 돌, 지렛대로 민물고기 잡아 초고추장에 날름

뭐니 뭐니 해도 겨울철 사냥의 별미는 얼음판이다. 꽁꽁 언 저수지에서 복령 캐는 창이나 도끼로 구멍을 내고 빙어낚시를 하여 통째로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고소함은 나무랄 데 없는 즐거움이다. 철사 오므려 억새줄기 묶어 드리우면 까딱까딱 입질을 해대매 "잡았다. 잡았어" 환호를 지르고 몇몇이 서로 먹으려고 손놀림 재빠르다.

살얼음 위에서 미꾸라지, 꺾지, 모자때기, 중보때기, 피리, 왕등어(망둥이), 바닥에 유유히 헤엄치면 구경하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그 중 한 놈이 "야, 우리 쩌기 냇가로 가자. 지렛대는 내가 갖고 갈텡게 누가 초고추장 한나 갖고 오니라"하면 "메는 내가 챙길게"하여 몫을 나눈다.

아이들도 세상 입맛은 아는 터라 직접 고기를 잡기로 맘먹은 것이다. 경사가 심해 물살이 거센 곳은 얼음이 얼지는 않지만 12월 초부터는 물도 차갑다. 손시렵고 발 꽁꽁, 찬바람마저 불면 잔뜩 움츠리고 돌부리에 살짝 걸리거나 부딪혀도 뼈마저 얼얼하다. 이때 아이들이 끙끙대며 물 속에 있는 큰 돌을 들어올려 툭 떨어뜨리면 바위틈에 들어가 있던 온갖 잡고기 물 위로 퉁퉁 하얀 배를 뒤집고 떠오른다. 조리나 채반으로 건진다.

공사판에서 구한 쇠 지렛대로 돌 사이에 넣고 첨벙첨벙 들썩들썩 움직여도 둥둥 떴다. 옆에선 쇠메를 '쩡쩡', '텅텅' 때리면 날피리 종류가 먼저 뜨고 꺾지, 개구리는 흐릿한 흙탕물 바닥에 뒤집어져 있다.

나는 그때마다 냇가를 옮겨가는 동안 물가에 자생하는 돌미나리를 뿌리째 뽑아 물에 들들 흔들어 흙을 씻어 몇 개씩을 챙긴다. 아무렇게나 툭툭 뜯어 강산성 빙초산 식초로 시큼하게 만든 초고추장에 몇 개 올려 민물고기 회를 먹을 준비를 한다.

이걸 먹어 말어. 시골 사람들은 아직도 이렇게 산다.
이걸 먹어 말어. 시골 사람들은 아직도 이렇게 산다.김규환

각자 알아서 배를 따는데 부레와 내장만을 버리고 비늘을 벗기고 대령한다.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손가락만한 고기를 초고추장 듬뿍 찍고 미나리 몇 개와 함께 싸서 입을 쫙 벌리면 세상에 '헉!'하며 혓바닥 한 번 놀라고 질겅질겅 씹어대니 오도독오도독 쫄깃쫄깃 비린내 하나 없이 기분 좋게 씹힌다. 한스럽고 서운한 것이 '쐬주' 한잔 있었더라면 추위도 물리치고 기분도 알딸딸 마른하늘 찬바람 쌩쌩 불어도 원이 없겠더라.

"규환아, 한나만 더 묵자."
"누가 못 먹게 했냐? 알아서 하셔."

그 즈음 나는 꺾지 '부멍치'(꺾지 일종)가 돌 사이사이에 노랗게 덕지덕지 깔겨놓은 알을 훑고 있었다. 손을 오므려 쭈욱 긁어 반대 손을 마저 갖다대면 한 줌 제대로 모아져 날름 입에 탁 털어 넣으면 입안에 잔잔한 향연이 펼쳐진다. 소리만 들리지 않을 뿐 톡톡 터지는 맛은 간마저 맞아 기분 째지게 좋아진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는 동안 아이들도 알 찾느라 하던 일 멈췄다.

한데 몰려들어 지렛대를 들썩이고 돌을 들어 던지느라 어깨에 힘이 빠진다. 적당히 배도 찼다 싶을 무렵 신발에 들어간 물이 얼어 시리다기보다 아려오면 서둘러 집으로 가야 한다. 괜스레 지체해봐야 발에 얼음 배기는 일을 자초하니 자칫 잘못했다가는 동상 걸리기 십상이었다.

"야 인자 그만 가자."
"불 좀 피우고 가면 안 될까?"
"언넝 집에 가서 부삭에서 쬐면 됭께 서두르자. 도저히 못 참겠당께."
"글면 이 건 누구 집으로 갖고 갈 것이여?"
"얌마, 초고추장 챙겨온 집으로 가면 될 꺼 아녀…."

무 채를 썰고 매운 양념으로 검은깨 넣고 손으로 주물럭거리면 바다 생선회 무침 못지 않은 특이한 맛이 있다. 비린내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이 무침은 집에서 직접 발효한 감식초였다.
무 채를 썰고 매운 양념으로 검은깨 넣고 손으로 주물럭거리면 바다 생선회 무침 못지 않은 특이한 맛이 있다. 비린내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이 무침은 집에서 직접 발효한 감식초였다.김규환

집에 가져가면 어른들은 빙초산에 회평 만들어 술독을 비운다

당최 참을 수가 없었다. 발을 디디지 못할 지경으로 곱아가고 있었다. 도랑을 나와 길을 걷자 바닥에 있던 잔돌이 발바닥에 박히는 듯 했다. 꾸부정한 자세로 총총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 저 왔어라우. 어휴 추워. 발이 꽁꽁 얼어부렀소."
"서서히 말려야 한다. 찬물에 당구고 있을 텨?"
"아녀라우, 글고 쩌거 좀 무쳐 주싯쇼."
"째까만 지달려라. 회평 만들어 줄 텡께."

어머니 손놀림이 빨라졌다. 민물고기 배를 따서 말끔하게 손질하고 무를 손질하여 똑똑똑 두껍게 채를 썬다. 매운 고춧가루, 생강, 마늘과 참깨를 넣고 내가 가져온 붉은 돌미나리를 썰어 요리조리 뒤적이고는 큰 것은 한두 번 자르고 작은 건 통째 집어넣고 마지막으로 빙초산을 밥솥 옆에 뒀다가 휘익 두른다.

숨이 멎을 듯, 코피가 터질 듯 진한 식초 냄새가 진동한다. 식초에 덴 고기가 빠르게 색이 변하며 흐릿해지기 무섭게 다시 뒤집는다. 파닥거리며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생선이 애처롭다는 생각보다는 저걸 하나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접고 옆집으로 뛰었다. 함께 갔던 아이들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모시러가는 건 내 몫이었다.

민물고기 회 무침을 '해평' 또는 '회평'이라 했다. 약간 숨이 죽은 생채가 아직 설컹거리지만 네모난 젓가락으로 반드시 고기 한 점을 낚아 한입 쏘옥 넣으면 된바람 소한, 대한 엄동설한에도 미치도록 입맛을 자극해 매콤하고 알딸딸한 기분을 만끽했다. 어른들 상은 따로 차려졌고, 몰래 담근 밀주 독아지가 비어가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침이 꼴딱꼴딱! 신선한 이 맛에 회를 먹는다.
보기만 해도 침이 꼴딱꼴딱! 신선한 이 맛에 회를 먹는다.김규환

남은 걸로 밥을 비벼 먹으면 시큼한 맛에 얼럴럴 혓바닥이 자지러진다.
남은 걸로 밥을 비벼 먹으면 시큼한 맛에 얼럴럴 혓바닥이 자지러진다.김규환


*글쓴이 부탁 말씀: 생태적인 측면이나 건강상 좋지 않은 방법이었음을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저도 인정합니다. 다만 여기서 그런 논란이 벌어지는 건 원치 않습니다. 단지 추억이었고 그 시절이 그립고 좋았다는 이야기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한때는 그 게 다인 걸로 여겼으니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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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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