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7회(2부 : 그녀를 향한 이카로스)

-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4.12.11 21:44수정 2004.12.1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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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4월 초쯤이었을까? 그날도 중앙도서관 3층 열람실에서 이런 저런 책을 잔뜩 빌려다 놓고 과제를 수행하고 있었다. 한 여학생이 저쪽에서 또박또박 작은 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나를 향해 걸어오더니, 똑똑 내 칸막이를 두드렸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순간, 나는 몸이 굳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눈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큰 눈에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내가 그녀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아,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그녀의 창! 내가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데, 그녀가 입을 뗐다. 목소리는 또 왜 그렇게 고운지, 꾀꼬리는 비교 대상이 되지 못했다.

"저어기,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
"네에. 무무 물어 보오세요."
"혹시 영희 못 봤어요? 박영희…"
"으음. 아마 아 2층 여여.. 열람실에 이 있을 거예요. 거 거기로 가보세요."

나는 얼마나 긴장했는지 말 배우기를 시작한 어린아이처럼 말을 더듬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살짝 미소 짓고는 다시 또박또박 작은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그녀는 가버렸지만 방금 전 나를 보며 이야기하던 그녀의 모습은 내 마음에 또렷하게 각인되어 한참 동안 사라지지를 않았다.

'분명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누구지? 누굴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해 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모르는데 그녀는 나를 어떻게 알았을까? 아까 옆에 끼고 있던 책으로 보아 우리 학과 학생 같은데… 그렇다면 왜 나는 그녀를 모르지?' 새끼를 치는 의문 속에 며칠이 지났다.

그러다 불현듯 아! 하며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옛날 고교 시절 나를 그토록 애태웠던 그녀, 분명 그녀였다. 그녀라는 확신이 서자 휴화산이 다시 용트림을 하는 것처럼 이상하게 내 가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우리 학과 학생이라니! 정말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는 입학하고 한달이 다 되도록 그녀를 못 봤을까? 신입생 주소록을 꺼냈다. 그러나 그것은 무용지물이었다. 그녀의 이름을 모르니 그럴 수밖에. 다음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영희를 찾았다.

"지난 화요일 점심때쯤 도서관에서 누가 영희씨를 찾던데, 만났어요?"
"누구요? 으음, 초희요?"
"초희? 그 여학생 이름이 초희입니까?"
"네. 아직 몰랐어요? B반의 허초희라고."


"그 여학생이 역시 우리 과 학생이었군요?"
"그것도 아직 몰랐어요?"
"네."
"그런데 초희는 왜요?"

"아니, 그냥 물어 봤어요."
"다음 LAB시간이면 볼 수 있을 텐데‥‥‥."
"네. 잘 알았습니다."

영희를 통해 그녀에 대한 것을 더 많이 알고 싶었지만, 더 이상 얘기했다가는 내 마음을 들킬 것 같아 그쯤에서 그만 두었다. 어쨌든 그녀의 이름을 알아냈다. 그리고 우리 과 학생임도 확인했다. 이것만으로도 큰 소득이 아닌가.

일주일에 한번 든 영어 LAB 시간이 되었다. 체육과목과 더불어 유일하게 A, B반이 함께 하는 수업 시간이다. 우리 학과 정원은 100명이 넘어서 A, B 두 반으로 나누어서 수업을 진행했다. 그러니 A반인 내가 B반인 그녀를 잘 모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면 그녀는 어떻게 나를 알았을까?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나를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보았고, 체육 시간에도 더러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왜 신입생환영회 때나 체육시간에 그녀를 못 보았을까?

돌이켜보니 신입생환영회 장소였던 홍명상가 디스코홀은 실내 조명이 비교적 어두웠다. 남자들은 보통 자기 소개를 조금 길게 했으나, 여자들은 대부분 "누구누구입니다" 정도만 이야기하고 앉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녀는 나를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또 우리 학과의 남녀 성비는 거의 2 대 8로 여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따라서 남자들의 행동은 금방 눈에 띄었으나 여자들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솔직히 B반 여학생들은 잘 몰랐다.

LAB 시간이 시작되자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알고 보니, 그녀는 내 앞에 앞에 옆에 앉아 있었다. 의외로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비록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지만 그녀를 보며 수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LAB 시간은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녀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나면서 아문 줄로만 알았던 고교 시절의 가슴앓이가 다시 도졌다. 그녀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절로 울렁거렸다. 그녀가 옛날의 그 연산소녀인지를 확인하고 싶어서라도 어떻게 말을 한번 붙여 봤으면 좋겠는데, 자연스럽게 그럴 계기가 좀처럼 마련되지 않았다.

체육 시간을 기대했으나, 운동장에 모여 담당 교수에게 인사하고 출석 확인하는 시간 이외에는 그녀를 볼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남자들은 농구와 배구를 했고 여자들은 테니스와 볼링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어 LAB 시간에는 그녀의 뒤통수를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천상 그녀에게 말을 붙이기 위해서는 그녀가 벤치에 앉아 있거나 쉬고 있는 시간에 직접 강의실로 찾아가야 하는데, 솔직히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치기만 하여도 얼굴이 화끈거려 내가 일부러 피할 정도였는데, 어떻게 그녀에게 말을 건넬 용기가 나겠는가?

벙어리 냉가슴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때의 심정을 나는 나의 일기장인 <사랑일기>에 시(詩)라는 형식을 빌려 다음과 같이 적고 있었다.

사랑돋이 1

한두번 얼굴을 비추더니
어느새 내 일기장을
그것도 며칠째
완전 장악해 버린 너의 이름!

분명, 너는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는
봄빛 태양!

사랑돋이 2

내 딴에는 지킨다고 지켰는데
왜 그리 쉽게 무장해제를 당한 걸까?

출애굽한 갈렙과 여호수아가
일곱번 여리고 성밖을 돈 것처럼
너도 나 모르게 내 둘레를 일곱번 공전한 거니?

아, 맥없이 그냥 무너져 내리는 나의 성(城)

짝사랑 3

그에게 나는 친구이지만
나에게 있어 그는 나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이다

그는 나를 부담 없이 만나지만
나는 그와 마주치기만 해도 명치끝이 아리다

그는 날 우정어린 눈길로 감싸지만
나는 차마 그 두 눈을 바로 볼 수가 없다
혹시 나의 사랑의 눈빛이 드러날까 봐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데
내 입술은 언제나 허드렛일에 분주하다

벙어리 냉가슴----
이는 분명 나를 두고 한 말이다

짝사랑 5

그대와 지금 같이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위로가 됩니다

아주 가끔씩
다른 사람을 통해 그대 소식을 접할 때면
난 간질환자처럼 발작증세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그대가 이 세상에 있기에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아닐까요?
다만 마음이 너무 아파서 탈이지

짝사랑 6

병은 자랑하라고 했다지만
아파도 아프다고 말 못하는 병
누구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은
무슨 큰 죄를 짓고 피해 다니는 죄인의 가슴이요
전염병이라도 간직한 보균자처럼 남몰래 퍼내는 눈물이다
온몸에 암세포가 퍼진 환자처럼
시시때때로 쏟아지는 이 통증
아, 어떻게 하면
이 어두운 병원의 터널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 8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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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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