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 6회(2부 : 그녀를 향한 이카로스)

-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4.12.07 08:38수정 2004.12.07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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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녀를 향한 이카로스

김형태
허초희! 그녀를 내가 다시 본 것은 대학에서였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것은 1984년도였다. 일반대학에 진학하여 경영학, 또는 회계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는 보란 듯이 공인회계사가 되는 것, 이것이 부모님께서 내게 거는 기대였다.


먼 친척 가운데 공인회계사로 일하는 분이 있었는데, 그 벌이나 지위가 꽤 괜찮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 사람은 멀지 않아 국회의원 선거에도 나올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그렇게 부러웠던지 아버지께서는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공공연히 공인회계사를 강요하셨다.

하다 안 되면 최소한 은행에는 들어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이 달랐다. 나는 적어도 그때까지는 정치나 경제 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신학이나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신학대학 진학을 희망했고, 구체적으로 서울 소재 Y대 신학과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 부모님과 갈등을 빚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내가 교회에 발을 처음 디딘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로 기억된다. 동네 어귀 옆 언덕에 제칠일 안식일 교회당이 뾰족하게 솟아 있었는데, 여름방학이면 그곳은 성경학교로 떠들썩했다. 아이들을 따라 몇 번 가서 "노아 할아버지 배를 짓는다. 노아 할아버지 배를 짓는다. 높은 산꼭대기에다 배를 짓는다" 등의 노래도 배우고 '삼손이 데릴라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들었다.

무엇보다 먹을 것과 선물을 많이 주어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성경 구절을 암송하거나 복음성가를 잘하면 특별한 선물이 주어졌다. 그 특별한 선물이란 주로 연필과 지우개 같은 학용품이었는데 서로 타려고 아이들 사이에 경쟁이 심했다. 단연 내가 독보적으로 휩쓸다시피 했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친구 녀석이 우리 할아버지한테 내가 교회에 들락거린다고 일러바쳤다. 할아버지는 유교적 신념이 강한 분으로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등 모든 종교를 배타시하였다. 모두 사람을 홀리는 것이라며 미신시했던 것이다.


그것을 들은 할아버지는 아니나 다를까 나를 불러 세워 놓고는 호통을 치면서 다시는 교회당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하였다. 심지어 교회에서 받은 선물을 모두 갖다 버리라고 했다. 차후로 다시 한번만 예배당에 들락거리면 그때는 두 다리가 성치 못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할아버지는 엄격하기가 그지없는 분이었다. 집안 식구 모두 어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동네에서도 호랑이 할아버지로 통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무서워 다시는 교회당에 얼씬거릴 수 없었다.


그런 나에게 예수를 영접하는 계기가 생겼다. 바로 중 2 때였는데, 그때 여선생님 세 분이 계셨다. 영어 선생님, 과학 선생님, 그리고 음악 선생님. 모두 기독교 신자로 수업 시간에 성경과 관련된 이야기를 자주 해 주셨다. 특히 음악을 가르치던 김 선생님은 피아노를 아주 잘 치는 분으로 '도나우 강의 잔 물결, 사랑의 기쁨, 알프스의 저녁놀, 소녀의 기도' 등을 자주 연주해 주셨다.

그 중에서도 '엘리제를 위하여'를 가장 많이 들려주었는데, 그 음악을 연주하는 시간이면 나는 숨소리를 죽여 가며 그 피아노 선율에 취했다. 정말 한없이 달콤하고 꿈처럼 행복한 시간이었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춤추듯 달려 다니는 선생님의 열 손가락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요정들의 무도회장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선생님들은 늘 토요일 오후가 되면 우리들을 데리고 읍내에 있는 교회에 갔다. 거기에서 찬송도 하고 말씀도 듣고 하면서 예배를 드렸다. 꿀맛 같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선생님들을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내 마음 속에 예수 그 분이 살고 계셨다. 나도 예수쟁이가 된 것이다. 물론 집안에는 알리지 않았다. 왜 늦느냐고 물으면 공부하다 왔다고 둘러댔다.

중3 때는 김 선생님과 영어를 가르치던 이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시게 되어 토요 예배가 없어졌다. 너무 아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일요일마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짬짬이 시간을 내어 예배를 드리곤 했다.

그러다 대전으로 고교 진학을 하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교회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가까운 교회를 선택하여 등록하고, 시골집에 내려갈 때만 빼 놓고는 토요 고등부 예배도 참석했다. 고2 때는 학습과 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나의 신앙 생활을 집안에서는 할아버지만 제외하고는 모두들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나 누구도 교회에 다니는 것을 시비하거나 간섭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와 겸상을 할 때 외에는 당당하게 식사 기도를 하고 밥을 먹었고, 할머니와 동생들에게 틈나는 대로 성경 이야기를 해주며 전도를 했다.

고 1에서 2학년을 거쳐 3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나의 신앙의 깊이는 점점 더해갔다. 정말 고2 후반기부터 졸업할 때까지는 예수님과의 첫사랑 시절이었다. 교회 생활에 열심인 것은 물론이고, 제일 먼저 등교해서 창문을 열고 기본적인 청소를 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성경책을 한장 읽고(주로 잠언을 읽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를 드린 다음 수업에 임했다.

그러자 언제부터인가 나의 별명이 '기독교 환자', '전도사', '목사님'이 되었다. 더러 나에게 대학을 가면 무엇을 전공할 것이냐고 물어오면,

"글쎄, 우리 부모님께서는 경제 쪽을 전공하길 원해, 그래서 나도 그럴까 하는데‥‥‥."

그러면 모두들 깜짝 놀라며,

"그래. 의외다. 나는 네가 신학을 전공할 줄 알았는데."

모두들 그러는 것이다. 이런 소리를 자주 들으면서 무심코 부모님 뜻을 따르려던 내 생각에 균열이 일기 시작하였다. 한동안 계속 나의 진로를 놓고 기도했다. 어떤 길이 내 길인가 응답해 달라고. 그럴 즈음에 나의 진로를 확정짓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우리 학년에 소아마비 학생이 하나 있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그 애 어머니께서 택시를 타고 등·하교를 시켰다. 1학년 때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그냥 지나쳤다. 그러나 2학년 2학기. 소위 말하는 신실한 크리스천이 되고부터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3학년 진급할 때는 꼭 저 애와 같은 반이 되게 해달라고. 그 기도가 이루어진다면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종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믿겠노라고, 그러면 주저 없이 신학의 길을 걷겠노라고. 나는 겁도 없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아울러 서언까지 하고 있었던 셈이다.

드디어 3학년으로 진급하던 1983년 3월 2일 첫날, 나는 3학년 1반으로 배정을 받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1반 교실로 달려갔다.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는 없었다. 거의 모두 들어와 앉았는데 여전히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새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는데 그때까지도 그는 없었다.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외면하셨구나.' 실망감에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그 순간 교실 앞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였다. 그의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교실로 그가 들어오고 있었다.

'오, 하나님!'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오죽하면 눈물이 나왔으랴.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확신, '지옥에서 천국으로-' 정말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날의 감동을 나의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확실히 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그토록 간절히 소원했던 최치환 학생을 같은 반이 되게 해 주심을, 다시 한번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의 뜻으로 알고 올 일년 동안 그의 손발 노릇을 하겠습니다. 모두가 꺼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종인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낮은 일이라도 당신의 뜻이라면 기꺼이 순종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치환이가 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웠으면 새학년 새학기 첫날에 울겠습니까? 아무도 친구가 되어 주지 않고 인간 대접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는 오늘 선생님께 말씀드려 그의 짝이 되었습니다. 내성적인 제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당신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기꺼이 그의 벗이 되어 그에게 항상 용기와 희망과 심어 주겠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 드리며 이 마음이 끝까지 변함이 없도록 지켜주시고 도와주소서. 할렐루야 아멘.


다음 날부터 나는 치환이가 등교할 때쯤 되면 1층 운동장에 내려가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택시 편으로 어머니와 함께 도착하면 그를 업고 3층 교실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용변을 보고 싶다고 하면 화장실까지 부축하여 다녀오는 등 사소한 일까지 도움을 주었다. 생각보다 그는 중증 장애인이었다.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처음에는 나의 도움을 부담스러워 하던 그가 시간이 지나자 흔쾌히 몸을 내게 맡겼다. 그러나 우리의 우정은 100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왜냐하면 6월쯤 그의 아버지가 서울로 직장을 옮기게 되어 그도 전학을 갔기 때문이다. 눈물로 그를 전송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12월. 대학 입학을 앞두고 나는 신학을 하겠다는 뜻을 밝히기 위해 비장한 각오 아래 양촌으로 내려갔다. 나의 말을 다 듣고 난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셨다. 그러나 얼굴에는 실망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리고 내 편이 되어 나를 이해해 주실 줄로 믿었던 어머니가 오히려 큰소리로 화를 내셨다.

"신학대학 가라고 지금까지 너를 공부시킨 줄 아냐?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부모 가슴에 못을 박아도 유분수가 있지. 네 마음대로 해라. 대신 오늘부터 엄마라고 부를 것도 없다. 자식 하나 없는 셈 치마."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곧이어 내 얘기가 할아버지 귀에까지 들어가자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내가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주님의 뜻과 부모님의 뜻이 상충되지 않도록 그토록 기도를 했건만 끝내‥‥‥.

나는 누나가 일단 대전으로 가있으라고 등 떠미는 바람에 도망 나오듯 시골집을 빠져 나오긴 했지만, 앞이 캄캄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 너무 답답한 나머지 나는 금식하며 철야로 기도를 했다. 그러나 시원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담임 목사님을 찾아뵙고 상담을 드리기로 했다. 내 얘길 다 듣고 난 목사님은

"김군, 그러면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나?"
"어떡해요? 목사님."
"음, 일단은 일반대학을 진학하게."
"네? 그러면 신학을 포기하라는‥‥‥."

"아니 그게 아니고, 일반대학에 들어가서 4년이라는 시간을 벌자는 말일세. 대학 4년 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부모님의 마음을 돌리게. 그 후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는 거야."
"아! 그러면 되겠군요."

칠흑같이 캄캄한 길을 가고 있는데 복도끝 유리창으로 햇빛이 한꺼번에 우르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것 같은 선명한 해답이었다.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일반대학에 진학하겠다고 하자 부모님도 내가 고개를 숙인 것으로 알고 화를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학과 선택이 문제였다. 부모님께서는 계속 경상 계열을 고집했지만, 나는 기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문학을 하고 싶었다. 어차피 4년 세상 공부를 하는 것이라면 가장 자유롭고 폭넓게 공부할 수 있는 것이 국어국문학인 것 같았다.

'우리 것을 먼저, 제대로 알고 기독교를 토착화시키는데 이바지해야지.' 그런 마음도 작용했다. 이번에는 내가 강경하게 나오자 부모님도 마지못해 허락하셨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워하는 눈빛이었다. 솔직히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떻게 나를 기르고 뒷바라지해 주셨는데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을 큰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는 일반인은 물론 대학생 과외교습도 금지되어 있었던 터라,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경제적 부담을 줄여드리기 위해 서울 진학을 포기하고 지방국립대학에 원서를 냈다. '어차피 4년 후엔 서울에 있는 신학대학원에 진학할 텐데.' 아쉬움을 그런 식으로 달랬다. 기대했던 대로 C대학에서 '4년 장학생'이라는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부모님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했다.

대학 생활은 처음부터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오리엔테이션, 신입생 환영회, 시·소설 등 분과별 모임, 서클(동아리) 모임, 거기에 교회 대학부 모임까지. 대학에 오면 시간이 남아돌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또 우리 과는 웬 과제가 그렇게 많은지 하루가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갔다.

* 7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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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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