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릉에 숨어 있는 아날로그형 통신시설

서귀포 70경(32) 서귀포연대방어유적

등록 2004.12.16 12:54수정 2004.12.17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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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해안가 구릉지대에 위치한 연대

해안가 구릉지대에 위치한 연대 ⓒ 김강임

예래동 가는 길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가는 95번 도로는 빛 바랜 늦가을 정취가 남아 있었다. 백발이 된 억새꽃, 길가에 피어 있는 빨간 사루비아, 떠나간 가을을 그리워하고 있는 노란 소국, 그리고 듬성듬성 쌓아 놓은 돌담 뒤로 야위어가는 가을 햇빛이 몸을 사린다.


자동차 창가에 내리쬐는 햇빛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계절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어느 지역보다도 일조량이 많은 서귀포의 햇빛은 과일을 달콤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까지도 여유롭게 만드는 것 같다.

지난 12월 11일, 서귀포 예래동의 해안가는 너무 한적하여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길을 따라서 바다를 한 모금 마셔 본다.

해안가 구릉지대에 숨어 있는 연대

해안가 구릉지대에 숨어 있는 아날로그형 통신 수단인 '연대방어유적'을 찾아 가기 위해서 바닷가 길모퉁이에 차를 세웠다. 서귀포시 하예동 1729번지 제주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23-11호. 관광지도에 그려진 이곳의 위치는 그저 점 하나만 찍어 놓았을 뿐 너무나 지면을 아꼈다.

a 언덕에 숨어 있는 표지석

언덕에 숨어 있는 표지석 ⓒ 김강임

사람이 다니는 곳이 길이고, 사람이 만들어내는 곳이 길인데 이렇게도 사람의 흔적이 없다니. 그러니 예래동의 해안가 구릉지대에 길이 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여름내 자라 온 무성한 풀을 제치고 언덕에서 제일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갔다. 횃불과 연기를 이용해 정치, 군사적으로 급한 소식을 전했던 서귀포 연대방어유적. 서귀포시가 서귀포 70경으로 지정해 놓고도 아직 예산이 없어서인지 그 길조차 닦아 놓지 못했던 점이 못내 아쉬웠다. 그러나 너무나 때묻지 않아 아름다운, 그 아름다움이 슬퍼 보이기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수풀 속에 묻혀 있는 표지석이 나를 반겼다. 수난의 역사 현장을 발견하고는 나는 "아!"라는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두가지, 하나는 그 현장이 예래동 마을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터였기 때문이고,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주변의 관리 상태가 너무나 허술하여 길조차 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a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 김강임

아날로그 통신 시설이 주는 생명력


연대 정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밟는 순간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초고속 정보화 시대에 살아가는 현대 사람들이 느끼는 원초적 아날로그의 통신 시설. 그러나 횃불과 연기로 교신을 했을 흔적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a 연대 정상에 올라

연대 정상에 올라 ⓒ 김강임

연대는 조선시대에는 횃불과 연기로 평시에는 1개, 이국 배가 나타나면 2개, 육지에 침범하면 4개, 접전시에는 5개를 올렸다 한다.

서귀포 연대방어유적은 동쪽으로는 별노천 연대, 서쪽으로는 산방연대, 북쪽으로 우루연대, 남쪽으로 무수연대와 교신했다. 연대의 정상에 올라 보니, 예래동의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수난을 겼어온 우리 민족의 현장, 그리고 방어의 역사까지도 느껴볼 만한 곳이다.

a 아날로그형 통신시설이 주는 생명력

아날로그형 통신시설이 주는 생명력 ⓒ 김강임

비록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가장 원초적인 아날로그형 통신 시설일지 모르지만, 정방형으로 쌓아 놓은 돌 하나 하나에는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거친 바닷바람을 맞아 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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