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그려낸 21세기 항해지도

<책으로 읽는 21세기> 기획한 이승우 기획실장

등록 2004.12.24 11:12수정 2005.07.07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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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책으로 읽는 21세기>를 기획하고 제작한 도서출판 길 이승우 기획실장.

<책으로 읽는 21세기>를 기획하고 제작한 도서출판 길 이승우 기획실장. ⓒ 조성일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던 그 때를 잠시 생각해보자. '밀레니엄 버그'가 온 세상을 다 집어삼킬 듯 엄청난 식욕을 과시하던 그 때 말이다.

신문과 방송에서 연일 쏟아내던 21세기 담론들을 떠올려보면 정말 조금만 방심하면 흔적조차 없이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그런 위기감이 온 몸을 팽배하게 휘감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렇게 호들갑스럽게 21세기 담론을 쏟아내던 신문과 방송 같은 '패스트 미디어'들은 지금 시치미를 뚝 떼고 편 가르기와 말초적 감성 자극에 열중하고 있다.

대신 그들이 던져버린 그 화두는 운 나쁘게도(?) 책 같은 '슬로우 미디어'들의 몫으로 돌려졌다. 출판기획자들의 몸과 마음이 덩달아 고달파졌다. 여기서 만나는 <책으로 읽는 21세기>의 기획자인 도서출판 길 이승우 기획실장도 그 유탄을 직접 맞은 셈이다. 그를 만났다.

'주제''사람' 이어 '책'으로 21세기 모색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생뚱맞게 웬 출판기획자 인터뷰?'하고 눈이 휘둥그레질 독자들이 있을까봐 먼저 설명한다. 이런 책의 경우 필자들의 글도 물론 중요하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의식의 흐름을 좇는 것이 더 유용한 책읽기가 아닐까 해서 기획자에게서 기획의도와 기획의 구체화 과정, 책으로 만들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알아보기 위함이다.

a <책으로 읽는 21세기> 표지 이미지.

<책으로 읽는 21세기> 표지 이미지. ⓒ 도서출판 길

따라서 이 인터뷰에서는 출판의 성패가 기획에 달려있다는 식의 '출판 기획 만능 시대'와 같은 요즘 출판계의 화두와는 무관한 얘기들을 주고 받았다.


이 책 <책으로 읽는 21세기>는 책제목이 암시하듯 21세기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책에 대한 서평을 모아 놓았다.

이 책에는 필자 55명이 참여해 철학·종교학·역사학·인류학·정치경제학·사회학·여성학·NGO학·물리학·생물과학·환경과학·실용과학·기호학·문학·건축학·애니메이션학·영화학·광고학 등 19개 학문 분야의 책 100여 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분야별로 현재 가장 언급이 많이 되고, 또 가장 주목받는 책들 중 1990년 이후에 나온 책들을 소개하는 21세기에 관한 '종합책선물세트'다. 좀 거창한 표현을 쓰면 '책으로 그려낸 21세기 항해지도'다.

"애초 기획은 '주제·사람·책' 3가지 방법으로 21세기에 접근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문제의식은 21세기에 새롭게 만나게 될 키워드는 무엇이냐, 그 새로운 키워드에 대한 이론화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것이었습니다."

'주제'를 다룬 2001년에 나온 <지식의 최전선>과 '사람'을 다룬 2003년의 <월경하는 지식의 모험자들>(이상 한길사 펴냄) 같은 전작들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이 책들의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이어지며 '책'을 다루면서 완결성을 갖는 3부작 묶음에 <책으로 읽는 21세기>를 놓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개인 사정으로 한길사를 그만두고 도서출판 길로 합류한 이승우 실장은 새둥지에서 만드는 첫 작품으로 이 책을 기획했다.

가장 다루기 힘든 분야는 자연과학

21세기의 화두는 아무래도 세계화·정보화·생명공학·기술의 발달 등 이런 것들이라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이들 학문 영역이 어떤 흐름을 갖고 있는지 그 속내를 한번 들여다보자는 게 기획 의도였습니다. 다행히 한길사에서 저의 이런 기획을 과감하게 수용해 주어서 책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지요."

a 기획할 때 자연과학 분야가 가장 어려웠다고 말하는 이승우 실장.

기획할 때 자연과학 분야가 가장 어려웠다고 말하는 이승우 실장. ⓒ 조성일

<지식의 최전선> 52명, <월경하는 지식의 모험자들> 60명, <책으로 읽는 21세기> 55명 이렇게 모두 170여명에 가까운 필자군을 동원하면서 책을 만들 수 있는 기획자가 그리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행운아다. 물론 그 많은 필자들을 동원하여 책으로 묶어내기까지는 총괄진행자로서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멍들어야 하는지는 논외로 치고 말이다.

어느 것이 더 이익이었느냐 따위 세속적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에게는 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어느 분야가 가장 어려웠느냐는 상투적이고 점잖은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자연과학 분야였어요. 저를 인문 기획자라고 규정해도 틀리지 않은데 이 기획은 전반적으로 모든 학문 분야를 들여다보자는 것이잖아요. 그렇다고 내가 모른다고 뺄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카이스트를 찾아가서 아무 방이나 교수 문패가 달린 방문을 노크했지요. 궁하면 통한다고 거기서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습니다."

이처럼 이 책이 아우르는 분야는 모두 기획자가 발품을 팔아서 분야와 다룰 책을 선정했지만 곳곳에 매설된 지뢰 때문에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분야도 많다. 미술·음악·교육·정신분석·심리 같은 분야가 들어가지 못한 것을 보더라도 말이다. 실제로 음악이나 미술의 경우 필자를 섭외했지만 다룰 책이 없어서 넣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어느 출판평론가가 그에게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느냐고 묻더란다.

이승우는 누구인가?
이름 담보할 수 있는 인문서 기획자

만약 기획자의 이름이 브랜드로서의 가치- 이를 테면 기획자 이름이 곧 믿을 수 있는 책으로 통할 수 있는 상표 같은 의미-가 있다면 도서출판 길의 이승우 기획실장의 이름 석 자 앞에 '좋은 책 기획자'를 넣어도 괜찮을 듯 싶다.

대학에서 유학과 역사를 전공과 부전공으로 하고 한길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승우는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한길사의 도서목록 한 부분을 장식한다.

학술서를 주로 낸 '한길 그레이트 북스'를 비롯해 평전 분야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연 '한길로로로 시리즈'에 기획자로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대학에서 쫓겨나 재야에 있던 김상봉 교수를 만난 것을 비롯 이정우, 노성두, 이이화 등 내로라하는 필자들이 그의 손을 거쳐 독자들과 만났다.

한길사를 그만두고 한겨레 편집위원장 출신인 박우정씨가 운영하는 도서출판 길과 인연을 맺은 그는 인문 기획자를 고집한다. 그래서 하이데거 책만 내는 출판사, 종교 책만 내는 출판사들이 존재하는 독일처럼 인문 분야만 전문으로 내는 그런 출판사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가 내년에 내겠다고 계획하고 있는 '코기토 시리즈', '역사도서관 시리즈' '프런티어 21 시리즈' 등의 세부 목록 면면을 살펴보면 그의 얘기가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승우는 최고 지성들의 책을 내되 애매모호한 책은 절대 내지 않겠다고 말한다.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는 인문학 출판의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하나하나 반석을 올려놓는 심정으로 서두르지 않고 따박따박 나아가겠다고 했다. / 조성일 기자
"당연히 아니죠. 그 질문엔 무슨 대표성 같은 것이 있느냐는 뉘앙스가 포함돼 있는 듯 하였는데 그렇게 할 수도 없거니와 할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다만 이런 시각에서 이런 문제제기를 할 수 있구나 하는 하나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이승우 실장은 필자들에게 정보와 지식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서평을 써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학술지에 실을 서평이 아니라 일반 독자들의 독서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비판보다는 책 내용이 드러나는 설명 위주의 글 같은 것 말이다.

"글마다 형식과 글투가 다 달랐지요.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실었습니다. 개성만큼이나 분야별 특성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였죠. 솔직히 말하면 각양각색인 그 글들을 균질하게 작업할 수 있는 여건도 능력도 안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애초 70여 명에게 원고를 청탁했는데, 그리고 원고 작성 기간을 2개월로 정했는데, 9개월이 지나서야 그것도 52명만이 원고를 보내줬다는 것이다. 원고수급 기간이 길어지면서 예상치 않은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됐다.

"다루는 내용들이 학문적 합의를 본 것이 아니라 한창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들이 많다보니 원고를 수급하는 동안에 내용을 수정해야 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시의성 문제였죠. 정말 힘들었어요. 이게 과연 가능할까 하고 회의감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당초 계획보다 엄청나게 긴 1년 6개월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먹고서야 책은 세상에 나왔다. 전작들의 판매 현황에 비추어보면 이 책 또한 독자들의 관심권 안에 머물 것같기는 한데 '교보문고 광화문점 창립 이래 매출 감소' 뉴스가 시사하듯 이 책도 전반적 경기침체의 영향권 안에 들까봐 이 실장은 노심초사한다.

다루지 못한 분야 있어 아쉬움

더욱이 이 책은 여느 책과 달리 초기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터라 이 실장은 내심 긴장된단다. 현대기업금융에서 제작비 일부를 투자받아 초기부담은 많이 덜었는데 투자자에게 이익을 돌려주어야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그게 오히려 부담감이 된다고 이 실장은 말한다.

이승우 실장은 책을 편집할 때 분야별 배치 순서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필자이기도 한 이정우 교수의 조언을 받아 문화나 응용학문을 우선 배치했던 전작들과 달리 이 책에서는 전통적인 학문 분류방식을 따랐다고 했다.

a 평생 인문주의자로 사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이승우 실장.

평생 인문주의자로 사는 게 꿈이라고 말하는 이승우 실장. ⓒ 조성일

이쯤에서 눈에 띄는 흠이 있는 것 같다며 기획자의 아킬레스건을 건들여봤다. 각 분야마다 앞부분에 머리글에 해당하는 총론을 실었는데 역사학의 경우 한국사나 서양사를 망라해 다뤘는데도 머리글은 서양사만 다뤘다든지, 문학 분야에서는 아예 이 부분이 빠져있는데 그 이유를 넣지 않다든지 하는 점을 지적했다.

일반 독자들이 읽기가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는 지적에 대해서 그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근대 학문이 들어온 이후 우리나라에서 내세울만한 학자가 없지 않습니까? 하향평준화나 대중추수주의도 좋지만 인문학만큼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가벼운 읽을거리로 승부하기 보단 독일 출판계처럼 무거운 주제를 깊게 다룬 책들을 묵묵히 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왕 내친 김에 아픈 곳을 한 군데 더 찔러봤다. 그럼 수익성은?

"수익성은 책의 질 싸움이라고 봅니다. 좋은 책, 꼭 필요한 책은 시대를 막론하고 수요는 있습니다. 그 효과가 다만 더딜 뿐이죠. 그리고 너도나도 다 돈 안 된다고 인문학을 떠나잖아요. 그게 오히려 희소성의 원칙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시 그다운 논리다. 좀 혹평하면 '자기만족' 내지 '자아도취'에 빠진 출판인이다. 그러나 그가 정말 시대에 뒤떨어진 것인지는 좀더 두고 볼 일이다. 여하튼 그런 그 덕분에 <책으로 읽는 21세기>와 같은 책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

책으로 읽는 21세기

김호기.이정우.전진삼.홍욱희 외 55인 지음,
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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