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과불식,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다"

<강의-나의 고전독법> 저자 신영복 선생의 새해 덕담

등록 2005.01.04 09:35수정 2005.07.0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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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신영복 교수가 새해 덕담을 직접 그리고 쓴 서화, ‘석과불식(碩果不食)'.

신영복 교수가 새해 덕담을 직접 그리고 쓴 서화, ‘석과불식(碩果不食)'. ⓒ 신영복


a 신영복 교수

신영복 교수 ⓒ 조성일

사람들이 그 이름 앞에 ‘사색하는 선비’란 수식어를 주저 없이 붙이는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 그가 ‘석과불식(碩果不食)’을 새해 덕담으로 건넸다.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로 풀이할 수 있는 이 말은 <주역>의 64괘 중 가장 어려운 상황을 나타내는 박괘(剝卦)에 나온다. 박괘는 세상이 온통 악으로 넘치고 단 한 개의 양효(선)만 남아있는 상태인데, 그 한 개의 양효마저 언제 음효(악)로 전락할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말한다. 흔히 다섯 마리의 고기가 꿰미에 매달려 있는 고단한 형국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 박괘는 ‘절망이 곧 희망의 기회’임을 함축하고 있다.


"박괘는 늦가을 잎이 모두 져버린 감나무 가지 끝에 빨간 감 한 개를 남겨놓은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지요.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든 잎사귀를 떨어버리고 있는 나목입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내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나목처럼 우리 삶의 실상을 인식하게 되면 희망의 싹을 어떻게 틔워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단다. 떨어진 잎사귀가 뿌리의 거름이 되듯 절망은 희망의 싹을 틔우는 밑거름이 된다.

완고한 과거의 규정력을 청산하자

들머리부터 <주역> 속으로 안내하는 이 인터뷰는 최근에 나온 신영복 교수의 책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이하 <강의>, 돌베개 펴냄) 때문이기는 하지만 때가 때인지라 새해 덕담부터 듣지 않을 수 없었다.

해서 <강의>에 대한 본격적인 인터뷰에 들어가기에 앞서 신영복 교수가 누구인지는 독자들이 잘 알고 있을 터인즉 새삼스럽게 이력을 나열하는 수고는 덜기로 하고, 내친김에 강의 주제에서 벗어난 질문인 묵은해인 2004년을 어떻게 정리하는지를 여쭸다.


“조선 중기부터 일제시대, 자유당,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우리는 한번도 과거의 지배구조를 청산하지 못했습니다.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그런 완고한 과거의 규정력이 밖으로 드러나면서 진정한 변혁을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2004년은 완고한 규정력이 힘들게 했던 한해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정치, 경제, 군사적 자립성과 연결되는 외부의 규정력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던 한해였죠.”

신영복 교수는 온달을 바보로 만드는 완고한 보수주의를 청산해야 한다고 했다. 고구려의 사회적 변동기에 서민들의 신분상승이 일어날 때 그 선두주자였던 온달을 상류지배층이 눈뜨고 볼 수 없어 바보로 만든 것처럼 언론, 법조, 기업이 완고한 보수진지를 형성하고 있어 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신영복 교수는 지적한다.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들을 한번 보세요. 제자백가들 모두 농본주의, 복고주의를 지향했습니다. 그런데 법가만이 유독 새로운 사회의 대응방식을 주장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법가만이 천하통일을 하잖아요.”

그러면서 신영복 교수는 농부가 밭일을 하다 나무그루터기에 부딪쳐 죽은 토끼를 잡게 되는데, 그 다음날부터 농부는 일은 하지 않고 토끼 오기만을 기다린다는 수주대토(守株待兎) 고사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이 고사는 어제의 일이 오늘도 일어나리라는 복고주의를 풍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송나라 농부는 완고한 보수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고전을 읽는 것은 역사를 읽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고전 ‘강의’로 시작한 인터뷰는 이쯤에서 본론인 <강의>로 들어가서, 간략한 책 소개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a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표지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표지 ⓒ 돌베개

“제가 경제학자이기 때문에 비전공자가 교양과목으로 한 강의를 묶은 책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이 책은 고전에 대한 본격적인 해설서라기보다 우리의 현실과 현대 자본주의, 자본주의 상품문화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고전을 통해 풀어낸 ‘강의’입니다. 오늘날의 여러 가지 당면문제를 고전을 통해 재구성하려는 의도에서 강의 내용을 풀어쓴 것이기도 하고, 당면 과제의 뜻을 강론한 것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나의 동양고전 독법’이란 부제를 달았습니다.”

그럼 지금 왜 고전을 읽어야 할까, 또 읽는다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에 대해 신영복 교수에게 물었다.

“우리들이 고전을 읽는 이유는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지요.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전 읽기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그런 필요성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신영복 교수는 ‘강의’ 하면서 내내 어려웠다고 한다.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한자 공부를 하지 않아 언어장애가 있었기도 하거니와(그래서 3, 4학년생만 수강할 수 있도록 제한했는데, 다음 학기부터는 제한을 없앨 작정이란다), 진정성이 떨어지는 젊은이들의 감수성, 시쳇말로 세대차이 때문에 적잖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수감 시절 치약 껍데기에 적었던 동양고전 예시문 활용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예시문은 감옥살이 할 때 동양고전을 보면서 치약 껍데기(요즘 치약 껍데기로는 안 되고 예전의 양철로 된 치약 껍데기만 가능)로 표시해뒀기에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단다.

고전 하면 으레 떠올릴 수 있는 단어가 ‘보수’다. 고전적 해석이 정통이어서 그렇다. 그럼에도 신영복 교수는 고전에 대한 진보적 해석을 시도한다.

"고전 자체는 지배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수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지배계급인 양반들의 전유물로 되어 있었죠. 그러나 실학에서 보여주었듯 고전 자체를 재해석하기보다 현실 문제를 ‘창신’(蒼新)의 방법으로 ‘온고’(溫故)하고, 온고보다 창신에 무게를 두는 입장이지요. 그래서 고전 독법은 새로운 것이 부단히 나와야 합니다. 물론 제 해석에 대해 비판이 있겠지만 이런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영복 교수는 조선 성리학이 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라는 과도한 비판을 받았지만 모든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근검절약을 강조하는 유교자본주의 논리 같은 것은 지금도 유효한 패러다임이라는 것. 그래서 신영복 교수는 자신이 경제학자이지만 여전히 ‘소비가 미덕인가’, ‘소비가 미덕인 사회가 과연 지속적이고, 합리적인가’ 하는 딜레마에 빠져있다고 말한다.

‘관계론’을 화두로 삼다

이 책에서 신영복 교수는 ‘관계론’이라는 화두를 걸어놓고, 시경, 서경, 초사, 주역, 논어, 맹자, 노자, 장자, 묵자, 순자, 한비자, 불교, 신유학, 대학, 중용, 양명학을 그물코로 연결하여 새롭게 읽는다. ‘관계론’이라 함은 개별적인 존재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유럽 근대사의 ‘존재론’과 달리 동양사회의 구성원리로,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말한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신영복 교수는 감옥에서의 명상체험을 통해 관계론을 터득했다고 했다. 최초의 유년 시절부터 모든 삶을 추체험(다른 사람의 체험을 마치 자신이 체험한 것처럼 느끼는 것)하기 위해 그동안 만난 사람들에 대한 면벽명상을 했는데, 만났던 사람과 일의 총화가 결국 자신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더라는 것. 나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과의 관계망에 자신의 정체성이 연결되어 있더란다.

“존재론이 끊임없는 자기증식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운동의 표현으로 성장을 상징한다면, 관계론은 글자 하나하나에 독립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획이 모여 글자가 되고 글자가 모여 행이 되고 행이 모여 연이 되듯 관계망 속에 있음을 의미하여 ‘분배’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철우 의원’ 사건, 가정포기하려 한 것과 같아“

다시 말해 관계론은 나와 다른 것이 서로 침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관계론적 입장에서 최근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이철우 의원 사건’에 대한 촌평을 부탁했다. 그러자 신영복 교수는 부부싸움에 비유하여 설명했다.

“가정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다면 어느 선에서 절제합니다. 그러나 가정을 포기하기로 했다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사회 자체에 대한 공동체적 의식이 부족한데서 사회 갈등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그러면서 신영복 교수는 논어의 ‘화동론’(和同論)이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설명한다.

화(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 즉 관용과 공존의 논리이다. 반면 동(同)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관만을 용납하는 것이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인 것이다. 그래서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를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로 해석한다.

a 새해 덕담 ‘석과불식(碩果不食)’을 쓰는 신영복 교수.

새해 덕담 ‘석과불식(碩果不食)’을 쓰는 신영복 교수. ⓒ 조성일

이렇듯 신영복 교수는 질적인 발전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화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2008년이면 신영복 교수가 감옥에서 나온 지도 20년이 되는 해란다. 그래서 이번에 낸 <강의>의 서술 형식에도 큰 의미를 부여했다.

"지금까지 제 책 모두는 서간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강의>는 서간체가 아닌 강의하는 형식입니다. 서간체에서 다른 문체로 바꾸었죠. 출소 20년이 되는 2008년까지 이런 강의 형식의 책을 한 권 더 냈으면 하고 욕심을 부려봅니다.”

인터뷰 갈무리 질문으로 던진 계획에 대해 대답하면서 신영복 교수는 이렇게 제안했다.

“학교에 오가면서 잎사귀를 떨고 서있는 느티나무를 늘 봅니다. 사람도 나무처럼 겨울을 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겨울방학은 여행 대신 나목처럼 서서 사색하는 시간이 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나목처럼 겨울나기를 한번 해보면 어떨는지요?”

한편 신영복 교수는 5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3층 컨벤션센터에서 ‘동양고전으로 성찰하는 오늘과 내일’이라는 주제로 새해 강연을 할 예정이다.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돌베개,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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