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넘의 솔개가 살림 밑천 물고 가네!"

<내 추억속의 그 이름 215>닭에 얽힌 추억

등록 2005.01.03 14:41수정 2005.01.0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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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모이를 쪼고 있는 암탉 두 마리
열심히 모이를 쪼고 있는 암탉 두 마리이종찬
"아따! 오늘 하늘 참 디기(많이) 맑네. 마치 면경알(작은 거울)을 말갛게 닦아놓은 것만 같구먼."
"하늘이 암만(아무리) 맑으모 뭐하노. 내 맴(마음)에는 새까만 먹장구름이 항그석(수없이) 떠댕기고(떠다니고) 있는데."
"와? 집안에 머슨(무슨) 우환거리라도 있나?"
"막내 그기 올 겨울부터 맨날 병든 닭맨치로(닭처럼) 시름시름 앓고 안 있나."
"닭맨치로? 고마 닭을 한마리 푹 고아 믹이봐라(먹여봐라). 몸보신에는 인삼 두어 뿌리하고 대추 댓개(대여섯 개) 넣은 씨암탉 그기 최고 아이더나."



내가 태어나 자란 창원군 상남면 동산마을(지금의 창원시 상남동 옆)에서는 집집마다 닭을 스무 마리쯤 길렀다. 더 많이 기른 집도 더 적게 기른 집도 거의 없었다. 틈틈히 씨암탉이 21일 동안 알을 품어 깐 노오란 병아리가 예닐곱 마리쯤 새롭게 태어났지만 신기하게도 닭의 숫자는 그리 늘어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노오란 병아리가 중닭이 될 무렵이면 우리 마을사람들은 살이 통통하게 잘 오른 어미닭들을 가까운 상남시장에 내다 팔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암탉 서너 마리는 반드시 남겨두었다. 그중 알을 매일 같이 한 개씩 잘 낳는 암탉은 씨암탉으로 삼아 다시 알을 품게 하고, 알 낳는 게 영 신통찮은 암탉은 '폐계'라 하여 주로 몸보신용으로 썼다.

달걀도 마찬가지였다. 수탉 두어 마리에 스무 마리쯤 기르고 있었던 암탉들은 거의 매일 같이 한 개씩의 알을 '쑤욱쑥' 낳았다. 그렇게 달걀을 100여 개쯤 모으다 보면 상남면 소재지에서 오일장이 섰다. 달걀 또한 돈 구경하기가 어려웠던 우리 마을사람들에게 정말 알토란 같은 돈을 만지게 해주는 중요한 살림 밑천이었다.

그 당시 우리 마을사람들은 집안에 누군가 시름시름 앓을 때면 그 귀한 암탉을 한 마리 잡아 인삼과 대추, 밤을 넣고 가마솥에 푹 고아 먹였다. 특히 복날이 돌아오면 우리 마을사람들은 그렇게 애지중지 기르던 암탉을 한꺼번에 몇 마리씩 잡았다. 그러니까 닭은 우리 마을사람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약재이자 중요한 살림 밑천이었던 것이다.

"니 퍼뜩 가서 최산 좀 불러온나."
"와예? 닭 잡을라꼬예?"
"너거들 올개(올해) 들어서 얼굴이 노래지고 몸이 비실비실한 기 부쩍 안 좋아보여서 몸보신 좀 시킬라꼬 안 그라나."
"옴마(엄마)는 와(왜) 닭을 못 잡는데?"
"내 손으로 애지중지 키우던 저 닭들을 우째 내 손으로 잡것노."



내가 어릴 적에는 솔개가 닭을 많이 낚아채 갔다
내가 어릴 적에는 솔개가 닭을 많이 낚아채 갔다이종찬

알을 품고 있을까? 알을 낳고 있을까?
알을 품고 있을까? 알을 낳고 있을까?이종찬
그 당시 내 어머니는 닭을 잘 잡지 못했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은 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날에도 개나 돼지를 직접 잡는 곳에는 한 번도 가시지 않았다. 우리 형제들에게도 집에 부정이 탄다며 산 생명을 죽이는 그런 장소에는 함부로 가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셨다.

하긴, 멧돼지나 산토끼가 밭농사를 망쳐도 멀리서 지게 작대기를 들고 후여후여 그냥 쫓아내기만 하셨던 부모님이 모가지를 비틀어 닭을 직접 잡는 일을 어찌 하실 수 있었겠는가. 특히나 부모님 손으로 우리집에서 직접 기르던 자식 같은 그 닭을 말이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는 우리집에서 기르던 닭을 잡을 때마다 이웃집 어르신을 모셔오게 했다. 그리고 그 이웃집 어르신에게 모가지를 비틀어 닭을 잡아주는 대가로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내주었다. 그것도 뜨거운 물에 푹 담갔다가 어머니가 애써 닭털을 모두 뽑은 그 생닭을 말이다.

"♬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멀리~ 멀리 날아라~ 우리 비행기~♬"
"야야~ 지금 비행기가 뜬 기 아이고 솔개가 떠뿟다. 퍼뜩 집에 가서 닭 단속 안 하고 뭐하노?"
"예에에?"
"저런저런! 저 넘의 솔개가 너거(너희) 집 살림 밑천 물고 가네."


그랬다. 그 당시 우리 마을에는 솔개가 참 많았다. 특히 솔개는 겨울철이 되면 우리 마을 주변에 자주 나타났다. 하루종일 황토마당에 풀어놓은 병아리나 중닭을 낚아채기 위해서였다. 마을 들머리에 솔개가 나타나면 마을 아이들은 자치기나 숨바꼭질을 하다가도 서둘러 집으로 달려가 마당에서 꼬꼬거리고 있는 닭들을 닭장 안으로 몰아넣기에 바빴다.

하지만 한 번 솔개가 마을에 나타나면 좀처럼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솔개는 우리 마을의 새파란 하늘을 진종일 빙빙 돌면서 긴 목을 이리저리 흔들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잠시라도 사람이 닭 주변에서 멀어지기라도 하면 날쌔게 날아내려와 순식간에 중병아리 한 마리를 낚아채 하늘 저만치 날아가버리곤 했다.

그때에는 모두 닭을 마당에 풀어놓고 길렀다
그때에는 모두 닭을 마당에 풀어놓고 길렀다이종찬

닭은 희망의 상징이다
닭은 희망의 상징이다이종찬
그 때문에 우리 마을 아이들은 솔개로부터 닭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담벼락에 긴 장대를 세워두었다가 초가지붕 위에 솔개가 떠돌면 솔개를 향해 후여후여 휘젓기도 했고, 아예 닭을 닭장에 그대로 가두어 놓기도 했다. 하지만 하루종일 닭들을 닭장 안에 그대로 가두어 놓을 수는 없었다.

"저 넘(놈)의 솔개 땜에 오늘 우리집 닭들 모두 굶어죽게 생겼다카이."
"나는 겨울철만 되모(되면) 저 넘의 솔개 땜에 골치가 딱 아푸다카이. 잘 생각하모 솔개를 잡는 머슨(무슨) 뾰쪽한 수가 있기는 있을 낀데."
"워낙 빨라야제. 장대로 솔개집을 털어뿔라 캐도(털어버리려 해도) 솔개 저 넘은 집을 낭랑끈티(낭떠러지) 지은께네 우짤 수가 있나."


그 당시만 하더라도 닭에게 따로 모이를 주지 않았다. 그저 때마다 끼니를 때우고 난 뒤 어쩌다 쬐끔 남는 음식물 찌꺼기가 곧바로 닭의 밥이었다. 그런 까닭에 지금처럼 음식물 찌꺼기가 남을 게 없었다. 아니, 지금처럼 넘쳐나는 음식물 찌꺼기 때문에 분리수거를 한다거나 하는 그런 고민을 할 까닭이 없었다.

눈깔사탕 하나 제대로 사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배 고팠던 그 시절, 사람조차도 먹을 게 모자라 쩔쩔 맬 때였다. 끼니 때마다 닭에게 줄 음식물 찌꺼기가 모자라서 걱정이었다. 또한 그 때문에 닭을 하루종일 황토마당에 풀어놓아 제 나름대로 모이를 쪼아먹게 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수도 있었다.

그때 하루에 서너 번씩 우리 마을에 나타나 초가지붕 위를 빙빙 떠돌던 솔개는 우리 마을의 살림 밑천을 훔쳐가는 날강도였다. 아니, 겨울방학을 맞이하여 손등이 터져 피가 나도록 딱지치기와 얼음지치기를 하던 우리들에게 가장 큰 훼방꾼이자 날도적이었다. 어쩌다 솔개에게 닭을 한 마리를 뺏기기라도 하면 마을 어르신들께서는 당장 살림이 거덜난 것처럼 길길이 날뛰었으니까.

비단 닭을 훔쳐가는 것은 솔개뿐만이 아니었다. 족제비도 밤새 닭을 훔쳐가는 큰 도둑이었다. 솔개는 그나마 중병아리보다 더 큰 닭은 함부로 낚아채지 못했지만 족제비는 어미닭이든 중병아리든 가리지 않고 물고 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무섭고 큰 날강도는 이웃 마을에서 살아가는 마을 형들이었다.

그래. 예나 지금이나 늘 사람이 문제였다. 솔개나 족제비야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 애지중지 기르던 닭을 가끔 한 마리씩 훔쳐갔지만 마을 형들은 한꺼번에 몇 마리씩의 닭을 훔쳐갔다. 그리고 그 모든 책임을 솔개와 족제비에게 억지로 덮어 씌웠다. 사람이 저지른 죄를 애매한 동물들에게 마구 뒤집어 씌웠던 것이다.

"니, 닭 지키라 캤더마는 오데 갔다 왔길레 닭이 한꺼번에 몇 마리씩이나 없어지뿟노?"
"닭을 훔쳐가는 기 오데 솔개하고 족제비뿐입니꺼?"
"그라모 누가 닭을 훔쳐갔단 말고(말이냐)?"
"아까 낮도깨비 몇 마리가 나타나가꼬 그랬다 아입니꺼."
"낮도깨비? 내 이 넘의 손들을 고마!"


"닭을 훔쳐가는 기 오데 솔개하고 족제비뿐입니꺼?"
"닭을 훔쳐가는 기 오데 솔개하고 족제비뿐입니꺼?"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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