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지찌개로 땡추위 묵은 해 몽땅 날려요

<내 추억속의 그 이름 214> 겨울철에 제 맛나는 비지찌개

등록 2004.12.27 15:04수정 2004.12.27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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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한 비지찌개 한그릇 드세요
구수한 비지찌개 한그릇 드세요이종찬
세월은 빠르다. 세월은 물처럼 느긋하게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총알처럼 쌩 하고 날아가는 것만 같다. 꼭 한 장 남은 묵은 달력을 벽에서 떼내고 새로운 달력을 건다. 을씨년스럽다. 해마다 이맘때 새 달력을 벽에 걸 때마다 나는 12월의 마지막 며칠을 새 달력이 고스란히 훔쳐가버리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어 마음이 울적하다.


흐르는 세월을 누가 막으랴. 아니, 어쩌면 세월은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는데 사람이 달력에 제 나이를 새겨넣으며 세월을 매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한 해가 묵은 해라는 꼬리표를 달고 저만치 기억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한다. 또 한 해가 새로운 해라는 이름표를 달고 숨가쁘게 달려오고 있다.

아쉬움과 기대가 서로 숨박꼭질을 하고 있다. 망년회, 신년회라는 이름표를 단 술자리 모임도 잦아진다. 밤 늦도록 이런 저런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평소보다 많이 마시는 술 때문에 이른 새벽마다 목이 탄다. 얼음 같이 찬 물을 벌컥벌컥 마셔보지만 숙취에 시달린 쓰린 속은 좀처럼 달래지지 않는다.

아침상에 앉으면 마지못해 한술 뜨는 밥알이 모래알처럼 껄끄럽게 느껴진다. 쓰린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얼큰한 해장국물 같은 음식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그렇다고 매일 아침마다 해장국만 후룩룩 후루룩 먹을 수는 없다. 이런 때 콩나물과 잘 익은 김치를 숭숭 썰어넣은 비지찌개를 끓여보자.

흐르는 물에 콩나물을 깨끗하게 씻는다
흐르는 물에 콩나물을 깨끗하게 씻는다이종찬

김장김치, 양파, 마늘, 대파, 매운 고추를 준비한다.
김장김치, 양파, 마늘, 대파, 매운 고추를 준비한다.이종찬
비지찌개는 겨울철에 끓여먹어야 구수한 제 맛이 난다. 비지찌개는 숙취 때문에 잃어버린 입맛을 되살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맛도 좋고 영양가도 많다. 만드는 방법 또한 아주 간편하다. 흔하디 흔한 콩나물과 김치, 비지만 있으면 그만이다.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적당히 양념한 돼지비곗살을 넣으면 더욱 맛이 좋다.

"오늘 또 메주로(메주를) 만들라꼬예?"
"아이다. 메주로 말라꼬(뭐하려고) 자꾸 만들끼고?"
"그라모 콩은 만다꼬(왜) 저리 잔뜩 불려놨습니꺼?"
"두부 만들어 묵을라꼬 안 그라나. 올개(올해)가 가기 전에 몸보신을 한번 해야 안 되것나. 덕분에 올 겨울 내내 묵을 비지도 건지고."



어릴적 우리 마을 어머니들은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이면 햇살 잘 드는 황토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물에 불린 콩을 맷돌에 갈아 고소한 손두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두부를 거르고 남은 콩찌꺼기, 즉 콩비지는 양손으로 커다란 눈송이처럼 동그랗게 다져두었다가 추운 겨울 내내 따스한 밑반찬으로 삼았다.

이맘때, 그러니까 한 해가 며칠 남지 않은 꼭 이맘때 마을 어머니들이 모여 손두부를 만드는 그날은 우리 마을에서 한바탕 두부잔치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날은 우리 마을 사람들의 송년회였는지도 모른다. 오후가 되어 두부가 다 만들어질 즈음이 되면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몰려들었으니까.


냄비에 된장과 고추장을 3:1의 비율로 섞고 비지와 멸치 육수를 조금 부어 버무린다
냄비에 된장과 고추장을 3:1의 비율로 섞고 비지와 멸치 육수를 조금 부어 버무린다이종찬

냄비에 콩나물을 넣고 끓인다
냄비에 콩나물을 넣고 끓인다이종찬
그때 마을 아버지들은 금방 잘라낸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두부를 금방 장독대에서 꺼낸 벌건 김치를 돌돌 감아 막걸리를 몇 말씩 드셨다. 그리고 술이 얼큰하게 취하면 징과 괭과리를 치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두부를 몇 모씩 나눠 주었다. 두부 먹고 궂은 일 다 날려보내고, 두부 먹고 더욱 힘을 내서 내년 농사 잘 짓자며.

"새터떼기(새터댁)! 새터떼기도 고마 한잔 묵고 춤도 좀 쳐라. 오늘 같은 날 신나게 놈시로(놀면서) 궂은 일 안 내빌모(버리면) 내년 농사꺼정(농사까지) 베리뿔 수도 있다카이(망칠 수도 있다니까)."
"듬정떼기 저거는 괭과리 안 치고 뭐하노? 나중에 비지로(비지를) 한 개라도 더 가꼬 갈라카모(갈려면) 퍼뜩 괭과리 잡고 사람들 신명 좀 나게 해라카이."


그랬다. 그날부터 한동안은 끼니 때마다 밥상 위에는 늘 두부로 만든 반찬이 몇 가지씩 올라오곤 했다. 생두부, 두부튀김, 두부절임, 두부 된장찌개, 비지찌개 등. 그중 나는 콩나물과 김치를 송송 썰어넣은 비지찌개를 가장 좋아했다. 비지찌개만 올라오면 나는 쌀이 약간 섞인 보리밥을 두 그릇씩이나 뚝딱 먹어치웠다.

내 어머니께서는 돼지 비곗살이 없이도 비지찌개를 참 맛있게 잘 끓이셨다. 어머니께서 비지찌개를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먼저 안방에서 기르고 있는 콩나물을 꺼내 콩깍지를 가려낸 뒤 물로 깨끗하게 씻었다. 이어 냄비에 된장 서너 숟갈과 고추장 한 숟갈을 넣고 버무린 뒤 비지와 콩나물, 송송 썬 김장김치를 넣고 멸치 우린 물을 부은 뒤 불 위에 올렸다.

준비한 재료를 부엌칼로 썰고 마늘은 찧는다
준비한 재료를 부엌칼로 썰고 마늘은 찧는다이종찬

비지와 콩나물을 익힌 냄비에 썰어놓은 재료를 모두 넣는다
비지와 콩나물을 익힌 냄비에 썰어놓은 재료를 모두 넣는다이종찬
어머니께서는 장작불 위에서 비지찌개가 천천히 끓고 있는 동안 부엌칼로 마늘을 콩콩 찧고 양파와 대파, 매운 고추를 송송 썰었다. 그리고 비지찌개가 어느 정도 끓었다 싶으면 냄비 두껑을 열고 마늘, 양파, 대파, 매운 고추를 한꺼번에 집어넣은 뒤 국자로 비지찌개를 조금 떠내 맛을 보면 그만이었다.

"여기다 돼지 비곗살만 쪼매 넣으모 너거 아부지 술안주로 정말 끝내줄 낀데…."
"옴마(엄마)! 내는 돼지비곗살이 정말 싫다. 다음에 혹시 돼지비곗살이 생기더라캐도 내 꺼는 따로 끓여주라."
"하긴, 콩 이기 밭에서 나는 고기 아이가."


지난 일요일, 나는 정말 오랜만에 비지찌개를 만들었다. 며칠 전 아내가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차림표에 비지찌개가 있는 것을 보고 내 생각이 나더라며 비지와 콩나물을 사다 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내 어머니의 손맛을 떠올리며 비지찌개를 끓이기 시작하자 두 딸들이 더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아빠! 배 고파."
"조금만 기다려. 거의 다 됐어."
"근데 이게 무슨 냄새야?"
"왜 맛없는 냄새가 나?"
"아니. 아까부터 자꾸만 입에 침이 돌아서."


맛나게 잘 끓고 있는 비지찌개
맛나게 잘 끓고 있는 비지찌개이종찬

잘 끓인 비지찌개, 돼지비곗살을 넣으면 더욱 맛이 있다.
잘 끓인 비지찌개, 돼지비곗살을 넣으면 더욱 맛이 있다.이종찬
이제 올해도 정말 며칠 남지 않았다. 여기저기 오라는 곳도 많고 가는 곳마다 술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런 때 쓰린 속도 달랠 겸 하루쯤 일찍 집으로 들어와 맛난 비지찌개를 만들어보자. 오랫만에 가족들과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맛난 비지찌개를 먹으며 알콩달콩 이야기도 나누고, 묵은 해와 추위도 한꺼번에 날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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