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 날은 어때?"

<내 추억속의 그 이름 213> 서울일기<16>

등록 2004.12.23 18:27수정 2004.12.23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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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그 처녀는 추운 내 마음에 연탄불처럼 따스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해 겨울, 그 처녀는 추운 내 마음에 연탄불처럼 따스하게 다가오고 있었다이종찬
그래, 이대로 나를 던져
너의 식어가는 사랑에 다시 불을 지필 수만 있다면
오늘 저녁
내 마음 파랗게 불태우리라


그래, 이대로 추운 불구덕에 들어가
너의 시린 몸을 따스하게 데울 수만 있다면
오늘 밤
내 살점 구석구석 바알간 불꽃을 피우리라

그래, 이대로 살얼음 낀 길거리에 뿌려져
너가 미끄러지지 않고 걸어갈 수만 있다면
이른 새벽
내 희부연 뼈 남김없이 잘게 부숴져도 좋으리라

- 이소리 '연탄' 모두


그래. 어쩌면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의 "총각이 내 사위가 되는 것은 어때?"라는 그 말씀은 그렇찮아도 추운 겨울을 나고 있는 내게 연탄불처럼 따스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아니, 피붙이 하나 없는 서울에서 서로 살가운 정을 깊이 나눌 수 있는 꼭 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 해도 정말 살맛 나는 일이었다.

사실, 나는 아무도 날 기다리고 있지 않은 달셋방이 정말 을씨년스러워 보일 때가 많았다. 어쩌다 술을 한잔 마시다가 밤 늦게 들어갔을 때, 연탄불마저 꺼진 연탄 아궁이에서 한숨을 포옥 내쉬며 허연 연탄재를 꺼낼 때, 발이 시릴 정도로 차거운 방 안에 엉거주춤 들어섰을 때, 그렇게 쓸쓸하고 추울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옆방에 사는 신혼부부의 따스한 연탄 아궁이를 부러운 듯 바라보곤 했다. 그 연탄 아궁이에서 24시간 내내 활활활 타오르고 있는 연탄불처럼 따스한 사람, 정말 서로의 마음을 따스하게 데워 주는 그런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연탄재처럼 내 한몸 던져 정말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여자를 찾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어때? 내 사위가 되는 게 싫어?"
"아… 아닙니다."
"근데 왜 그렇게 벌레 씹은 표정을 하고 있어? 내 딸이 마음에 안 들어? 아님 시장통에서 국밥집이나 하고 있는 이 아줌마 때문에 그래?"
"그… 그런 게 아니라 제가 너무 처지는 것 같아서…"
"뭐니 뭐니 해도 서로 마음만 통하면 그만인 거야. 그리고 총각이 어때서? 그만하면 일등 사윗감이구먼."



그랬다.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에게는 이듬해 2월에 00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는 따님이 한 명 있다고 했다. 내가 처음 학습지 회사에 들어갔을 때 국밥집 아주머니께서는 "요즈음 국문과 출신들은 취직하기도 어려운데, 내 딸도 그거나 한번 시켜 볼까?"라며 은근슬쩍 내 눈치를 살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국밥집 아주머니의 그 말씀을 새겨 듣지 않고 "시집이나 보내지요"하고 그냥 흘려 버렸다. 그래서였을까. 그 뒤부터 국밥집 아주머니는 따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나 또한 국빕집 아주머니에게 그런 따님이 있다는 그 사실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근데, 그날 국밥집 아주머니의 심부름을 왔던, 내게 막걸리까지 사 주었던 그 처녀가 따님이라니. 그 처녀는 첫눈에 보기에도 몸매가 늘씬했다. 게다가 쌍꺼풀 진 까만 눈동자가 서글서글한 게 보통 예쁜 처녀가 아니었다. 탤런트나 배우를 뺨치는, 마치 조각칼로 깎은 듯한 오목조목한 얼굴이었다.

"날씨도 추운데 소주를 드시지 않고 왜 막걸리를 드셔요?"
"소주는 독하잖아요."
"술 세죠? 글쓰는 분들은 대부분 말술을 드신다던데…"
"그걸 어떻게?"
"……"


그 처녀를 국밥집에서 처음 본 그날, 그 처녀와 나는 꼭 두 마디를 나누었다. 하지만 나는 그 처녀에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어머니로 모시는 국밥집 아주머니의 심부름을 온 그 처녀에게 술이나 마시면서 쓸데없이 수작을 거는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처녀는 국밥집에 머문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국밥집 아주머니와 내게 고개를 까딱 하더니 이내 신림시장을 총총총 빠져나갔다. 나는 속으로 참 예쁜 처녀로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잠시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내 그 처녀에 대한 생각을 깡그리 잊어 버리고 막걸리만 홀짝홀짝 마셨다.

그때 국밥집 아주머니께서 "오늘따라 막걸리 맛이 좋지?"라고 했던가. 그리고 나는 그저 지나가는 말로 "이쁜 처녀가 사 주어서 그런지 맛이 정말 기가 막히네요"라며 농담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 국밥집 아주머니께서 "나도 한잔 줘"하면서 "처녀가 저 정도면 꽤 괜찮아 보이지?"라고 물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이쁜 처녀가 따님인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 그 이쁜 처녀, 올해가 가기 전에 서로 한번 만나 보는 게 어때?"
"글쎄요? 따님께서 셋방살이하는 저를 어디 마음에 두기나 하겠습니까?"
"아, 첫선을 본 뒤 마음에도 없는 사람을 왜 다시 만나려고 하겠어?"
"첫선요?"
"첫선이 별 거 있나. 그렇게 보면 되는 거지. 요즈음 처녀 총각들은 첫선을 그렇게 본다며?"


그게 첫선이라니. 그렇다면 그 처녀가 나를 보기 위해 일부러 국밥집 아주머니의 심부름을 온 척했단 그말인가. 그런 것도 모르고 그날 나는 그 처녀에게 막걸리 심부름까지 시키게 하다니. 그러고 보면 국밥집 아주머니도 보기보다 정말 짖궂은 데가 있다. 그런 것을 내게 귀띔이라도 해 주었더라면 머리라도 한번 더 빗고 옷이라도 조금 괜찮은 걸 입고 나올 수도 있었는데.

근데도, 국밥집 아주머니의 따님이 나를 제법 좋게 받아들였다니. 갑자기 가슴이 콩콩콩 뛰기 시작했다. 그동안 국밥집 아주머니와 따님에게 큰 실수를 한 것만 같았다. 나는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나도 잘 모를 정도였다. 국밥집 아주머니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도 잘 서지 않았다.

사실, 그 예쁜 처녀가 그때 나를 처음 보고 지금까지 마음에 두고 있다면 더 이상 무슨 생각을 더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동안, 아니 오늘도 내가 어머님으로 부르고 있는 국밥집 아주머니와의 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끌고 나가야 될지도 잘 몰랐다.

"무얼 그리 골똘히 생각해?"
"괜히 예쁜 따님을 고생만 시킬 것 같아서…"
"그렇다고 당장 내 사위가 되라는 것도, 아니 내 사위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 그렇게 서로 부담 없이 1년이든 2년이든 사귀어 보라는 거지."
"그렇게 사귀다가 혹시 서로 헤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하시려구요?"
"그렇게 헤어질 것 같으면 애당초 결혼을 하지 말아야지. 나중에 애기까지 놓고 이혼이라도 하면 어찌 되겠어?"


늘상 춥고 쓸쓸하고 외롭기만 했던 내 마음의 방에 갑자기 따스한 연탄불을 넣은 것만 같았다. 내가 콧물과 눈물범벅이 되어 번개탄으로 겨우 피우는 그런 연탄불이 아니었다. 국밥집 아주머니께서 허연 재만 남은 내 마음의 연탄 아궁이에 활활 타오르는 연탄불을 갈아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나의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이 시린 막걸리를 홀짝홀짝 마시며 애써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그 때문에 국밥집 아주머니는 나의 동작 하나 하나와 얼굴 표정까지를 주의 깊게 살폈다. 국밥집 아주머니의 그 눈빛에는 행여 내가 억지로 끌려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안쓰러움이 묻어 있었다.

미웠다. 속으로는 좋아라 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렇게 막걸리만 홀짝홀짝 마시며 능청을 떨고 있는 내가 얄미웠다. 그랬다. 국밥집 아주머니의 말씀은 그 어디 하나 모난 데도 틀린 데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국밥집 아주머니는 나와 따님의 먼훗날까지 내다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쩔 거야? 내가 날을 잡아 줄까? 아니면 직접 연락을 할 거야?"
"제가 따님에게 먼저 연락을 할게요."
"언제? 내년 봄에?"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보기보다 낯가림이 많다는 것을."
"척 보면 몰라. 음~ 크리스마스 이브 날은 어때? 특별한 만남이니까 특별한 날에 만나야 오래 남는 법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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