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91회

등록 2005.01.05 07:57수정 2005.01.0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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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지막 생명줄까지도 구효기는 알고 있었다. 그는 살기 위하여 마지막 패를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마지막 패로 그를 쫒고 있는 자들과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협상하고자 했던 것이다.

“나는...나는....살 수....있...소.”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떠듬거리며 말을 뱉았다. 허나 그의 말에는 조금 전과 같은 기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당신은 살 수 있소.”

바로 옆좌석에 앉아 있던 한 인물이 일어나 구효기가 앉아 있는 탁자로 다가왔다. 그를 본 호면귀의 얼굴이 더욱 흑색으로 변했다. 사흘 동안 자신을 쫒던 무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였다. 자신의 수하 일곱명을 도륙하고 자신에게는 죽음의 공포를 맛보이기는 하되 마치 토끼몰이 하듯 자신을 이곳까지 오게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어떠랴. 이미 마지막 패까지 보인 상태에서 한가닥 가능성만 있다면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잡아야 했다.

“살...살려 주시겠소?”


회색 무복을 입고 있는 삼십대 중반의 사내. 머리는 대충 뒤로 넘겨 끈으로 묶었고, 전신에서 흐르는 기운은 투박함이다. 그러나 그를 자세히 보면 전형적인 사내다움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적당히 균형 잡힌 몸과 굵은 목선, 선이 굵은 이목구비 등이 잘 조화된 인물이었다.

그 사내는 검지로 입을 가렸다. 그것은 살려주겠다는 의미도 되고, 호면귀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말라는 표식이기도 했다.


“본인의 점도 봐 주시겠소?”

굵은 목소리와 함께 사내는 탁자 위에 올려진 호면귀의 금덩이를 구효기에게 밀면서 호면귀 옆 좌석에 자리했다. 마치 자신의 것처럼 복채로 내놓은 것이다. 그 행동에서는 이미 호면귀의 생명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모습이었다.

그 사내를 바라보는 통천신복 구효기의 얼굴에 미미한 변화가 일었다. 하지만 구효기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노부는 당신을 모르오. 하지만 당신이 무엇을 묻고자 하는지는 알 수 있소. 그 대가치고는 너무 작은 액수가 아니오?”

말과 함께 그는 엄지로 금덩이를 지긋이 누르기 시작했다.

파직----!

올려놓은 금덩이 중 맨 처음에 호면귀가 내놓은 것을 제외하고는 차례대로 누르기 시작하자 바스러지며 돌가루가 튀었다. 금을 입힌 돌이라 하나 엄지만으로 그것을 부스러뜨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통천신복 역시 한 수가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호면귀 사량의 행동이다. 그는 자신이 살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는 그 절박한 순간에서도 사기를 친 것이다. 사실 그렇게 다급한 순간에 내 놓은 복채가 가짜일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허나 그러한 순간만큼 사기를 칠 수 있는 기회도 별로 없다.

호면귀 사량은 천부적인 사기꾼이오, 천하제일의 사기꾼이라 할만했다.

“흐흐....복채도 안내는 자에게 점을 봐줄 수는 없지. 일단 노부부터 봐 주겠나?”

말과 함께 좌측에 있는 탁자에서 일어나 통천신복 구효기에게 걸어오는 인물이 있었다. 얼굴은 기이하게도 상흔이 많은데다가 회색빛을 띠고 있고, 날카로운 눈매와 매부리코를 가진 오십대 중반의 인물이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주먹 두개 정도 크기의 금과추(金瓜錘) 한쌍이 보이고, 일견하기에도 성질이 포악하게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가 모습을 보이자 장안루 안이 약간 술렁이는 듯 했다. 그를 바라 본 남궁산산이 나직하게 물었다.

“저 자는 감숙(甘肅)의 적령추살(狄靈錘殺) 도삼득(淘三鍀)이란 자가 아닌가요?”

“금과추 두개로 감숙 땅에서는 적수가 없다고 큰소리치는 위인이지. 어릴적부터 잔혹하기 이를데 없다고 알려진 인간이야.”

모용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들은 무림세가의 후손들답게 무림인들에 대한 견문이 매우 넓었다. 금과추는 병기 중 하나인 추(錘)의 일종으로 큰 쇳덩이에 손잡이를 달아 놓은 것이고, 그 모양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저 자보다는 저 자와 동행한 자가 더 위험한 인물이지.”

구양휘의 덧불이는 말에 담천의와 일행은 적령추살 도삼득이 앉아 있던 탁자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적령추살과 비슷한 연배의 짙은 적색 장포를 걸친 인물이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그의 양손은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렇군요...흐음....전독마조(電毒魔爪) 척응(慽膺)까지 나타나다니...”

전독마조 척응을 알아 본 모용수의 말은 중간에서 끊겼다. 적령추살 도삼득이 구효기 탁자에 이십여냥이나 나갈 것 같은 금덩이를 놓으며 앉았기 때문이었다.

“흐흐...돈 안 내는 손님은 소용없지. 그렇지 않은가? 신복?”

구효기의 청수한 얼굴에 검미(劍媚)가 꿈틀거렸다.

“무례한 손님 역시 필요 없지. 언제부터 적령추살 도삼득이 그렇게 천하를 오시(傲視)하고 살았는지 모르겠군.”

통천신복 구효기의 네 번째 원칙.
무례한 자는 점을 봐주지 않는다.

구효기와 적령추살 도삼득은 나이 차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도삼득이 반말을 하며 그의 탁자에 앉자 그의 무례함을 탓한 것이다. 통천신복의 날카로운 지적에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먼저 자리에 앉아 있던 회의무복사내가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구려. 아직 본인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먼저 점을 치려 하는 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아시오?”

마치 어른이 어린애에게 예의가 없다고 야단치는 듯한 말투였고, 모습이었다. 삼십대 장한이 오십이 넘은 인물을 야단치는 모습은 괴상한 광경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구효기의 말에 화가 나 있던 적령추살 도삼득이 그 흉맹한 눈빛을 번뜩이며 으르렁거렸다.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 놈이 감히 어른을 훈계하려 들다니... 머리통이 박살나고 싶으냐?”

그의 전신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눅 들게 하는 광폭함이 물씬 풍겼다. 하지만 회의무복사내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의 말투도 여전히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당신은 그럴만한 능력이 없소.”
“그래도 이 놈이...? 이곳만 아니었다면 당장 네 몸의 머리통을 부셔버렸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노부가 참는다.”

적령추살 도삼득은 진심이었다. 그가 이렇듯 자신에게 버릇없게 구는 놈을 살려 둔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는 말보다 몸이 빠른 더러운 성질을 가진 작자였다. 하지만 이 장안루 안에 있는 자들은 면면이 만만하게 볼 자들이 아니다. 그들에게 일이 터지기도 전에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것으로 인해 당신은 얼마간 더 숨쉴 수 있게 되었소.”

회의무복사내는 말과 함께 시선을 돌려 구효기를 바라 보았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적령추살은 화를 참지 못하고 갑자기 등뒤에서 금과추를 꺼내 들었다.

“이...이놈이 끝까지...?”

하지만 그는 손을 쓰지 않았다. 콧김만 씩씩 내 뿜을 뿐 그는 쳐올렸던 병기를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그로서는 정녕 일생을 통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만약 일행인 전독마조 척응의 전음만 아니었으면 손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기이한 것은 회의무복사내였다. 그는 적령추살이 금과추를 꺼내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미동도 없고, 그를 바라다 보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감정의 변화라 할 수 있는 가는 미소가 입술 끝에 걸린 것 같았다.

회의무복사내 역시 이 자리에서 손속을 나누려하지 않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적령추살 도삼득은 그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노기를 꾹 참으며 통천신복 구효기를 바라 보았다.

“제기럴...노부가 이곳에 와 망신살이 뻗치는군. 좋소. 구거사....!”

아쉬운 것은 그다. 그 역시 점을 보기 위해서는 통천신복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

“말하시오. 무엇을 알고 싶소?”

적령추살이 나름대로 예의를 갖추자 구효기는 고개를 끄떡이며 물었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온 적령추살의 말은 장안루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오룡번(五龍幡)이 이곳에 있는게 확실하오?”

그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 나오자 장안루 전체는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해졌다. 하지만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탐욕의 기색이 숨김없이 나타나고 있었다.

(23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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