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93회

등록 2005.01.07 08:17수정 2005.01.07 10:59
0
원고료로 응원
언제, 누가, 어떻게 손을 썼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죽어 있었다. 흑의무복사내는 손을 뻗어 호면귀의 머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그는 손가락에 묻어 나오는 핏물을 보고 호면귀의 사인(死因)을 찾아냈다.

“뇌호혈(腦戶穴)이오. 신복께서는 언제 이 자가 죽은지 알았소?”
“적령추살이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던 때였소.”
“그럼 적령추살이 이 자를 죽였단 말이오?”


사내의 말에 구효기는 탄식을 불어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휴--우. 당신은 분명하게 누가 왜 죽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노부의 입을 빌리려 하는구려. 좋소. 굳이 내 입을 빌리려 하니 말하겠소.”

통천신복 구효기는 회의무복사내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호면귀는 소리도 없고(無音), 바람도 일지 않으며(無風),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無影) 지력(指力)에 의해 죽었소.”

그 말이 떨어지자 어디선가 경악에 찬 음성이 터져 나왔다.


“천변무영객(千變無影客)의 회선무영지(回旋無影指)다!”
“그...그가 이곳에 있단 말인가?”

장안루 전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인물들의 면면은 결코 녹록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천변무영객이 있다면 모두가 노리고 있는 오룡번을 차지하기 힘들어진다. 천변무영객은 천하제일의 신투(神偸)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인물이든지 한번 보면 그로 변할 수 있다.
두 번 보면 그의 목소리와 똑같이 낼 수 있다.
세 번 보면 그의 사소한 버릇까지 따라할 수 있다.

이것이 그에게 천변(千變)이란 소리를 듣게 했고, 그림자도 남기지 않는 그의 경공(勁功)과 그의 독문지공(獨門指功)은 그를 무영(無影)이라 부르게 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훔쳐낼 수 있기에 반갑지 않는 객(客)으로 불리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천변무영객을 신비하게 만든 것은 아무도 그의 진면목을 모르는데 있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소.”

회의무복사내는 호면귀가 천변무영객의 회선무영지에 살해당했음을 알면서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분명 호면귀는 그가 찾고 있는 물건에 대해 그에게 중요한 단서를 줄 인물이었음에도 그러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천변무영객을 찾아내라면 조금 전 말했듯이 노부는 거절하겠소.”

통천신복 구효기는 단호하게 말을 짤랐다.

“천변무영객은 본인이 찾아 낼 것이오. 하지만 본인이 물을 말은 그것이 아니오. 스스로 점을 쳐 보건데 신복의 남은 생명은 얼마나 되오?”

그 말에 구효기의 청수한 얼굴에 한줄기 그늘이 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탄식과 함께 고개를 흔들면서 대답했다.

“휴우...많은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했소. 하지만 노부는 아직 이십년은 더 살 수 있소.”

말을 하면서도 통천신복은 이미 칼처럼 전신을 파고드는 회의무복사내의 날카로운 기(氣)를 느끼고 있었다.

몸(身)과 검(劍)이 하나로 될 때 신검합일(身劍合一)이라 하여 그 경지에 이를 때 비로서 검도(劍道)의 고수로 인정한다. 더 나아가 마음(心)이 검과 일치되고 마음으로 검을 펼쳐낼 수 있으면 이미 검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 경지에 오르면 마음(心)과 몸(身)이 하나가 되고 기(氣)를 형성하게 되어 기세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기세가 강하게 되면서 검을 뽑지 않아도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세만으로도 능히 상대를 살상(殺傷)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검도의 최고봉이라는 의기상인(意氣傷人)의 경지다. 그리고 그 경지를 넘어서면 마음으로 검을 만들어 내는 전설 속의 심검(心劍)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구효기는 사내가 몸으로 뿜어내는 검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은 이 자리에서 죽을지 몰랐다. 하지만 구효기는 미소를 띠웠다.

“당신은 나를 죽이지 않을거요.”
“왜 그러리라고 생각하오?”
“아직까지 노부는 당신이 찾고자 하는 물건을 찾는데 필요한 역할을 해 줄 사람이기 때문이오.”

구효기의 대답에 사내의 입가에 처음 미소라 할만한 흰 선이 나타났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 이름은 강명(姜明)이오.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겠소.”

왜 갑자기 이름을 밝혔는지 모르지만 강명이라 이름을 밝힌 회의무복사내는 말을 마친 후 바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너무나 많이 알고 있어 위험한 인물이었지만 통천신복의 말대로 아직 그의 일에 필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면귀는 죽었다. 통천신복의 점괘는 이번에도 정확히 들어맞았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그렇다면 오룡번은 그의 말대로 이 장안루 안에 있을 것이다.

장안루 전체는 긴장감 속에 잠겼다. 가끔 통천신복 구효기를 흘끔거릴 뿐 구효기에게 다가와 점을 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구효기와 시선이 마주칠세라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만약 구효기가 어느 인물을 유심히 살핀다던지 신경을 쓰는 듯 보는 자가 있다면 그가 오룡번을 가지고 있다고 오해받기 쉬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오룡번이나 강명이란 회의무복사내가 찾는다는 두 가지 무가지보 중 하나라도 가지고 있다는 오해를 받게 되면 온전히 살아 나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모두 느끼고 있었다.

칼이라도 대면 찢어질 것 같은 긴장감은 네 명의 사내가 장안루 안으로 관(棺)을 들고 들어오면서 더욱 고조되기 시작했다. 네 명의 사내는 언뜻 보아도 시신(屍身)을 수습하는 장의(葬儀)들이다. 그들은 서슴없이 통천신복의 탁자로 와서 죽어 있는 호면귀 사량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능숙하게 서서히 굳어가고 있는 호면귀의 시신을 관에 똑바로 누이고 양손을 배위로 모은 뒤 관뚜껑을 닫고는 아무 말 없이 장안루를 나섰다.

시신을 치우는데 무어라 말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호면귀 사량이 생전에 어느 조직에 몸담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호면귀 사량은 천하제일의 사기꾼이었으므로 짐작한대로 하오문(下午門)에 몸담고 있었을 것이다.

하오문(下午門)은 도둑, 소매치기, 사기꾼, 건달, 한량 등 오만 시정잡배들이 모인 집단이다. 사실 이들을 무림문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들은 그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모인 집단이었고,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그들 나름대로의 규칙을 세우고 서로 도움을 주는 공제(共濟)의 역할을 해줄 뿐이었다.

이들이 하오문에 가입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였다. 그들 신분으로 보아 대개 가정을 이루는 적도 거의 없고,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객사(客死)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호면귀 사량과 같이 죽고 난 뒤에는 시신이라도 거둬주는 곳이 필요했다. 죽은 뒤 자신의 시신이 버려져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고, 하오문에 가입하면 그러한 공포는 잊을 수 있었다.

다만 무림인들이 하오문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 조직의 성격 상 개방과 비등할 정도의 정보력(情報力)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림에 대한 정보는 개방에 뒤질지 몰라도 세상사에 대한 광범위한 정보는 하오문을 따라 갈만한 곳이 없다.

사람들의 대부분은 조금 전 통천신복과 강명이란 회의무복사내가 대화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통천신복은 분명 호면귀에게 반드시 죽을 것이라 말했다. 다만 그가 속한 조직과 당신을 믿고 있는 사람을 배반하고 죽느냐 아니면 명예롭게 죽느냐 하는 선택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아마 하오문과 천변무영객을 배반하고 죽을 것이냐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천변무영객이 하오문의 이대공봉(二大供奉) 중 한명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했다. 강명이란 사내가 찾고자 하는 사람은 천변무영객일 것이고, 아마 호면귀 사량은 천변무영객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면귀 사량이 자신을 팔아 목숨을 구걸하려하자 천변무영객은 호면귀 사량을 죽였을 것이다.

강명이란 사내가 통천신복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확신해 준 것도 호면귀 사량이 왜 죽었는지를 이미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강명이란 사내는 이미 천변무영객이 호면귀를 죽일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 죽이는 과정에서 천변무영객의 꼬리를 잡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더 이상 오는 손님이 없는 것 같군.”

통천신복은 주위를 돌아 보며 자신에게 더 이상 점을 보러 오는 사람이 없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영(刀煐). 노부도 살 길을 찾아야겠다.”

무슨 뜻일까? 구효기는 자신의 호위로 보이는 흑의무복의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지금까지 도영이란 흑의무복 사내가 입을 연 적은 한번도 없음을 구효기도 안다. 좌중의 시선이 구효기의 움직임에 따라 일제히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이곳에 있는 인물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상황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2. 2 "독도 조형물 철거한 윤석열 정부, 이유는 '이것' 때문" "독도 조형물 철거한 윤석열 정부, 이유는 '이것' 때문"
  3. 3 방치된 폐가였는데 이젠 50만명이 넘게 찾는다 방치된 폐가였는데 이젠 50만명이 넘게 찾는다
  4. 4 일본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어떤 관계일까 일본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어떤 관계일까
  5. 5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