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에서 아버지, 어머니, 딸 순으로 잠?

낙안읍성 26년 전 보고서를 맞춰보며...

등록 2005.01.09 02:16수정 2005.01.09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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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은 1983년 민속마을로 지정됐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70년 말에 타당성 조사가 시작되어, 1979년 승주군에 의해 낙안읍성 민속보존마을 조사연구보고서(1979년 12월 승주군편)가 작성됐다. 기자는 이번 연재를 앞두고 낙안읍성에 대해 사전조사를 하던 중, 당시 승주군이 작성했던 보고서를 접하게 됐다.


a 변한 게 많다면서 집 안팎을 안내하는 김치안씨

변한 게 많다면서 집 안팎을 안내하는 김치안씨 ⓒ 서정일

당시 보고서에 수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항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다음은 한 가정을 조사한 내용의 일부다.

'아버지(41) 농업, 어머니(33), 장녀(14) 학생, 차녀(12) 학생, 장남(10), 차남(8), 삼남(6), 논 1000평, 밭 200평, 돼지 2마리, 닭 5마리. 겨울에는 큰방에서 온 식구가 잠, 그러나 여름에는 장녀(14), 차녀(12)를 마루방에 재움, 머리는 윗목 쪽, 요강 사용, 아랫방은 세 내줌, 문에서부터 아버지, 어머니, 딸 순으로 잠.

일가친척이 오면 닭을 잡아서 대접, 제사는 마루방 뒤쪽. 재봉틀로 헌옷수선해서 입음, 상수-부엌 앞 펌프, 하수-마당, 개수대-다라이, 식기-스텐, 양은. 장작, 솔가지로 부엌에 둠. 목욕은 논밭 일이 끝나고 겨울에는 부엌에서 함. 벽에 페인트를 칠하고 싶어 함.'


a 늘어난 식구들이 있다면서 뒷마당으로 기자를 안내한다.

늘어난 식구들이 있다면서 뒷마당으로 기자를 안내한다. ⓒ 서정일

정말 세밀한 조사다. 가족사항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추운 겨울 저녁에 화장실 사용이 불편해서 요강을 사용한다거나, 가족들이 문에서부터 잠을 자는 순서까지 조사되었다.

지난 8일 방문한 김치안(67)씨 댁. 당시 어린 학생이던 5명의 자녀는 모두 성인이 되어 도회지에 나가고, 부부만이 낙안읍성 내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보고서가 작성된 지 26년이나 지났지만, 조사 내용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는 김씨, 추억인양 하나하나 짚어가며 기자에게 설명해 준다.


a 추위에 어쩔 수 없이 마루쪽에 새시를 달았다는 안채

추위에 어쩔 수 없이 마루쪽에 새시를 달았다는 안채 ⓒ 서정일

"그때 아랫방은 세를 내줬는데, 공무원이나 선생님, 면 서기, 우체국 직원들이 이 동네에 집을 얻어서 많이 살았어. 그래서 나도 세를 내줬구먼. 그리고 윗목 쪽에 머리를 두고 잤는데 아마 그게 동쪽이었는가봐, 원래 북쪽으로는 머리를 두지 않거든" 하면서 말문을 연다.

그럼 26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달라졌을까? 세월은 비켜갈 수 없듯이 당시 40대 초반이던 김씨는 60대 중반, 부인인 신대인씨는 환갑을 바라보고 있다. 아들딸들은 모두 도회지로 시집 장가를 가고 이곳엔 없다. 식구는 줄었지만 대신 닭 아홉 마리, 염소 한 마리, 개 세 마리, 소 두 마리가 한 식구가 되었다.


가족들의 변화뿐만 아니라 집 모양이나 생활모습도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특히 집안 내부가 살기에 불편하지 않도록 현대식으로 개조된 것이 가장 큰 변화다. 조사 당시에는 요강을 사용했지만, 지금은 실내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다. 당시에는 일가친척이 오면 닭을 잡아서 대접했지만, 지금은 고기를 사서 구어 먹는다.

"26년 전엔 벽에 페인트칠을 하고 싶다고 답하셨는데, 지금도 페인트칠하고 싶으세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당치도 않는 소리라고 답한다. 추워서 마루에 새시를 하긴 했지만, 더 이상 훼손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밭 200평도 팔고 나니 후회되더라면서 뭔가 없어지거나 훼손되면 그게 그렇게 아쉬움으로 남는다며 가능하면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고 싶다는 말로 끝을 맺는다.

a 민박집은 황토에 군불을 지펴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민박집은 황토에 군불을 지펴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 서정일

모든 것은 변한다. 낙안읍성도 예외일 수는 없다. 26년 전 승주군에서 작성했던 낙안읍성 조사보고서의 조사대상자 중 한사람인 김치안씨의 집에서도 낙안읍성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모습과 정신이 현대와 타협하는 현장을 보는 듯해서 다소 아쉬움이 남지만, 낙안읍성 주민에게 고립된 현대인을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잠을 잘 때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문에서부터 아버지, 어머니, 딸 순으로 잠을 자도록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함께 만들어가는 낙안읍성 연재
http://blog.naver.com/penfriends

덧붙이는 글 함께 만들어가는 낙안읍성 연재
http://blog.naver.com/pen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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