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95회

등록 2005.01.11 08:10수정 2005.01.1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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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내용은 걱정스러운 뜻이었지만 모용수의 얼굴에는 근심하는 표정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만 오해로 인한 분쟁을 막아 보자는 것이 그의 말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통천신복 구효기는 정색을 하며 구양휘 일행을 쭉 훑어 보았다.

“여기에 있는 사람만이 노부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데 어찌 노부가 이 자리에 오지 않을 수 있겠나?”


의외의 말이었다. 아무리 주위에서 위협을 가하고 있다 해도 그가 죽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 안에 있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내로라하는 고수들이어서 사실 일행에 구양휘와 광도가 있다 하나 구효기를 완벽하게 보호할만한 힘이 있다고 자신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허튼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구효기의 시선이 일행을 천천히 보다가 갈인규에게서 멈췄다.
“내 평생 선불을 받지 않고 점을 치는 일은 없었지만 갈소협이 노부를 살려준다고 약속하면 노부는 갈소협 일행의 점을 모두 봐 주겠네.”

이런 일은 그의 말대로 없었던 일이다. 일행은 구효기의 말에 모두 의아스러운 기색으로 갈인규를 바라 보았다. 일행 중에 가장 나이도 어리고, 있는 듯 없는 듯 일행과 어울렸던 갈인규다. 갑자기 모두 자신에게 쏠리자 다소 당황스러운 기색을 띠웠다.

“신복께서는 저를 아십니까?”
“어릴 적 갈선배의 품에 있던 자네를 본 적이 있네. 노부가 자네의 사주를 봐준 적도 있지. 노부가 생각한대로 훌륭하게 컸군.”

그의 부친인 갈유와 안면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구효기가 갈인규를 지목해서 살려달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를 곤란하게 만들 작정이십니까?”

그럼에도 갈인규는 구효기가 자신에게 무엇을 부탁하려는지 아는지 곤혹스러운 표정을 띠며 물었다.


“자네가 곤란해 할 것은 알지만 이 안에서 노부를 살려줄 사람은 자네 밖에 없으니 부탁하는 걸세.”
“아픈 사람을 보고 지나치지 않는 게 의원의 도리이지만 이건 좀 다르지 않습니까?”

갈인규는 확실히 뭔가 곤란한 모양이었다. 그 역시 부친인 갈유와 다니면서 무림의 생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리고 이 문제는 부친과 자신이 애써 회피하던 것이었다.

“자네 부친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나?”

그 말은 젊은 갈인규를 충동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부친이라면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직 젊었다. 자신의 부친처럼 애써 피하고 싶지 않았다.

“.........!”

그래도 망설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이 승낙하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는지 모른다. 생각에 잠겨있던 갈인규가 여러 가지 상념을 떨쳐버리듯 고개를 흔들며 구효기를 보았다.

“신복께서는 손을 내밀어 보시지요.”

그 말에 구효기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팔을 갈인규 쪽으로 뻗었다.

“자네가 어려운 결정을 해주어 고맙네.”

갈인규는 씁쓸한 고소를 지으며 구효기의 맥을 집으며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헌데 그때였다.

“네가 감히 우리 일을 망치려 드는게냐?”

노기를 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느새 그들 탁자로 다가들고 있었다. 전통적인 화복(華服)을 걸친 삼십대 전후의 인물이었다. 얼굴이 길쭉한 말상에 가는 눈매를 가지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한 살기를 느끼게 했다.

“당문(唐門)의 독비황(毒飛蝗)이라 불리는 당욱(唐郁)이로군.”

그를 본 팽악이 나직하게 뇌까렸다. 당문은 사천(四川) 당가(唐家)를 말한다. 독(毒)에 관한한 아직까지 그들과 견줄만한 문파나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무림세가라 하나 극히 폐쇄적이고 은밀해서 타 문파나 무림세가와 교분이 그리 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무림세가의 위치를 굳혔고, 무림인 누구라도 그들에게는 한 수 양보하는 터였다. 당가는 그들의 가문을 모욕한 자라면 그냥 두는 법이 없었다. 그들의 행사는 잔혹할 정도였지만 반드시 그 이유는 있었다.

“........!”

갈인규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짙어졌다. 그는 이러한 상황이 올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것 때문에 한사코 구효기의 부탁을 거절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대신 구효기가 다가오는 당욱을 보며 노기 어린 목소리로 꾸짖었다.

“허....아무리 모진 무림이라 해도 의원(醫員)이 중독(中毒)된 환자를 치료하겠다는데 그것까지 말리려 하는 겐가? 당가의 위세로 노부를 계속 핍박하려는 모양이구만.”

그제서야 사람들은 왜 구효기가 갈인규에게 목숨을 살려달라고 했는지 이해했다. 아마 당가의 인물들이 구효기에게 하독(下毒)했을 것이다. 중독된 구효기는 어쩔 수 없이 당문의 인물들에게 해약(解藥)을 부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므로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구효기가 천하제일의 신의인 갈유의 아들 갈인규에게 부탁하자 당문의 인물 중 가장 성질이 급하다는 당욱이 나섰던 것이다. 그들 일행으로 다가 온 당욱은 구효기의 꾸지람에도 그를 외면하고 갈인규에게 다가섰다.

“이놈. 네놈이나 네놈의 애비는 언제나 당가를 성가시게 하는구나.”

말과 함께 그는 갑자기 갈인규의 뺨을 갈겼다.
쨕---!
너무나 급작스러운 손찌검이어서 일행은 어안이 벙벙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뺨을 맞은 갈인규는 정작 예상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화를 내거나 손을 쓸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은 채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손자국이 선연한 그의 얼굴에서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차가운 한기가 흘렀다. 언제나 소극적이던 평상시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이 뺨 한 대는 처음으로 보는 외가(外家)의 가르침으로 알고 참겠소. 하지만 이 한 대로 피를 섞은 인연은 없는 것으로 하겠소. 분명한 것은 앞으로 본인은 아버님과 같이 당신들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살아가지는 않겠소.”

그의 대답에 일행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았다. 외가(外家)라면 갈인규의 어머니가 사천 당문의 여식이라는 말이다. 괴의 갈유가 한사코 고향인 사천 땅을 밟지 않았고 정주 손가장의 안주인 경여의 손에서 자란 이유가 이것이었던가?

(제 24 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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