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113회

등록 2005.02.04 08:06수정 2005.02.04 10:48
0
원고료로 응원
그것은 그들이 적랑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적랑대는 국경지역의 광활한 땅을 지배하는 자들이었다. 천여 명으로 이루어진 적랑대가 지나간 곳에는 살아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화염 뒤에 남은 재뿐이었다. 군(軍)에서도 마주치기 싫어 한다는 비적떼가 그들이었다.

"우리를 죽이면 귀대도 손실이 클 것이오. 이 지역에서 매년 백석 이상의 미곡을 어찌 구할 수 있겠소? 그러니…."


슈---욱--- 쨕!

매부리코 사내의 채찍이 공손벽의 얼굴을 감았다. 피가 튀며 그의 몸이 앞으로 꼬꾸라졌다. 왼쪽 뺨에 선명한 채찍자국과 함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더 이상 잔말 말고 결정해라. 여자 삼십 명을 내줄테냐, 아니면 백가촌이 오늘로 사라질테냐?"

공손벽은 고통을 참는 듯 한 손으로 뺨을 감싸 쥐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백가촌의 안전이었다. 만여 명이 넘는 촌민들이 무사히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촌장의 의무요 임무였다. 그는 어떠한 고통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위하여 단 한 명의 여자도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것이 공손벽의 신념이었다.

"좋소."
"여자들을 주겠다는 말이냐?"
"먼저 한 가지만 묻겠소. 이틀 전 이곳에 사는 어린 소녀가 실종되었소. 그 아이를 데려간 것이 적랑대였소?"


그 말에 이십여 명의 비적들은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그들의 표정으로 보아 걱정하고 있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었다.

"꽤 야들야들한 계집이었는데 지독한 년이었어. 어젯밤 자진해 죽었지. 흐… 흐…."


겨우 열 여섯이었다. 미색은 아니었지만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꽤 부지런하고 붙임성도 좋은 소녀였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약초를 캐러 갔던 소녀의 행방이 묘연해져 걱정을 하던 터였다. 우려했던 일이 사실로 확인되고 있었다. 그 어린 소녀를 저들은 무지막지하게 윤간했을 터였다. 아마 그 아이는 울부짖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들이 구해줄 것을 기다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아이의 비명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했다.

"아직 피어 보지도 못한 아이를…."

공손벽의 눈에 언뜻 물기가 스미는 듯 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제는 더 이상 대화로 타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 거구의 사내는 공손벽의 뒤에 서 있는 두 여인 중 연회색 옷을 입은 여자를 가리키며 낄낄거렸다.

"한 명 빼 준다… 대신 저 여자. 좋다. 저 여자는 반드시 데려간다."

그가 지목한 여자는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가 큰 전형적인 북방미인이었다. 아무 장식도 없이 뒤로 빗어 넘긴 채로 묶은 긴 머리가 허리에 닿을 듯 하고, 연회색 무명옷은 띠로 허리를 묶어 화려하고 거추장스러운 보통의 여인 옷과는 달리 밋밋했지만 그녀의 몸매와 미모를 감출 수는 없었다.

"……."

지목을 받은 여인의 눈에는 미세한 한기가 흘렀다. 그것은 분노를 애써 억누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꼭 쥔 주먹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공손벽이 지금까지 보였던 비굴한 태도나 웃음을 버리고 무심한 눈으로 돌아간 것은 그때였다.

…어차피 살아있어도 축생(畜生)과 다름없는 놈들이니…."

어깨를 펴고 적랑대를 바라보는 공손벽은 이미 조금 전의 그가 아니었다. 마치 갑자기 키가 한자나 더 큰 것처럼 느껴지고 전신에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엄이 흘러나왔다. 이러한 공손벽의 돌연한 변화에 매부리코 사내는 흠칫 놀랐다. 조금전 자신의 채찍을 맞은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 얼굴에 혈흔이 선연한데도 뭔가 달랐다.

"적화(赤花) 척탑(戚耷)! 살 가치가 없는 자들이다. 죽여라!"

공손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지목을 받았던 여인의 무명옷이 벗겨지는가 싶더니 여덟자루의 비도가 허공을 갈랐다.

"헉----!"
"아--악---!"

겉옷을 벗은 그녀의 상반신 전체는 빽빽하게 손바닥 만한 비도가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그녀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고 쌍수가 휘저어질 때마다 쏘아진 비수는 그들의 사혈을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척탑이라 불린 사내의 신형이 빛살처럼 적랑대 무리들을 향해 쏘아갔다. 그의 쌍수에는 어느새 어린애 머리통 만한 거부(巨斧) 한쌍이 들려 있었다.

쐐애액----퍼퍽---!

보기에도 거의 수십 근은 나갈 것 같은 도끼였다. 하지만 척탑이란 사내의 덩치는 다른 사람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거구여서인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쌍부를 놀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여섯 명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머리가 빠개지며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 놈이…!"

적랑대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구가 마상 위에서 신형을 솟구치며 척탑을 향해 도신(刀身)이 넓은 귀두도(鬼頭刀)를 휘두르며 쓸어갔다. 천부적으로 신력(神力)을 타고난 거구와 거구의 대결이었지만 그것은 너무 쉽게 결판이 지어졌다.

따--땅---!

척탑의 전신을 두동강낼 듯 쓸어갔던 귀두도와 척탑의 도끼가 부딪혀 불꽃을 튀었다. 그것 뿐이었다. 일도를 막아낸 척탑의 쌍부가 좌우로 쪼개어 들어가고 그것을 막으려던 귀두도와 부닥치는 순간 귀두도는 수조각으로 잘려짐과 동시에 쌍부는 그의 양쪽 어깨를 동시에 내리 찍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이 단단해 보이던 적랑대 수뇌의 전신근육은 두부처럼 으깨어졌다.

"우---억---!"

비명을 채 지를 사이도 없었다. 그의 몸은 어깨 위부터 아래와 분리된 채 피를 뿌리며 꼬꾸라졌다. 그것을 본 매부리코 사내는 좌측 옆구리에 꽂힌 비도를 뽑아내려다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언제나 자신이 속한 적랑대에 굽실거리며 스스로 미곡과 가축들을 바친 자들이었다. 헌데 갑작스럽게 변한 그들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단 두 명의 남녀가 순식간에 이십여 명이나 되는 적랑대 인원을 몰살시킨 것이다. 매부리코 인물도 무공을 알았다. 그 덕분에 그는 적랑대 내에서 소외되지 않을 정도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무공수위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정도였다. 마을 어귀에는 적랑대주를 비롯 적랑대의 본대가 준비하고 있을것이다. 거기까지만 간다면 살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허나 그것은 그만의 희망이었다. 양쪽 어깨 부위에 있는 거골혈(巨骨穴)에 두 자루의 비도가 박혀 팔을 아예 못 쓰게 만들더니 말에서 떨어지는 그의 대추혈(大椎穴)에 손잡이만 남기고 비도가 박히자 그는 목을 꺾은 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미 눈을 허옇게 까뒤집은 채 절명한 상태였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