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112회

등록 2005.02.03 07:42수정 2005.02.0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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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촌(百家村).
산서성(山西省) 북쪽 끝에 위치한 이곳은 처음 백 개의 가호(家戶)로 시작되었다고 하여 백가촌이라 불렸다. 처음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황량한 산자락을 일구고 전답을 만들기까지는 주로 나무와 사냥으로 연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부지런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백가촌이 생긴 지 삼십 년도 못되어 풍족해졌고, 가호 수도 수천으로 늘어나 있었다.

대개 변방에 있는 오지(奧地)로 간 사람들이 살지 못하는 이유는 전답을 만들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관(官)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도적들이나 산적들이 설쳐대기 일쑤였다. 하지만 백가촌에 정착한 사람들은 비적이나 도적들보다 오히려 관(官)에서 나와 간섭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언제나 관인들에게 반드시 뭔가를 들려 보내야 뒤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가촌의 촌장(村長)은 사십대 후반의 공손벽(公孫蘗)이란 인물이었다. 그는 워낙 말이 없는 사내라서 하루에 하는 말이 채 열 마디가 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말보다 행동을 먼저 하는 사람이었다. 백가촌의 대소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챙기면서도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으며 그 미소는 대답을 대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언제나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는 사라지고 굳게 다문 입은 열릴 줄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그는 백가촌에 중대한 결정을 할 일이 있었지만 뜻밖의 손님들은 그가 할 수 없는 선택을 요구하고 있었다.

"자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외진 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자네까지야 그렇다 해도 이곳의 자손들에게는 형벌과도 같을 것이네."

말을 한 인물은 나이를 추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한 노인이었다. 두툼한 솜옷을 입고 있는 그는 가끔 기침을 했다. 그 노인의 옆에 앉아 있는 두 노인 역시 모습은 그와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기이한 것은 그 노인들이 불구라는 사실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세상에 나가고자 할 것이네. 자네의 아이들은 물론 그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은 더 더욱 그럴 것이네."


말을 한 노인은 눈자위가 움푹 패여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비어 있었다. 등잔불은 어두워서 더욱 노인의 눈두덩이가 깊이 파여져 있는 것으로 보였다.

본래 눈알이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과거 그 자리에 있었던 유리알처럼 투명한 그 눈알은 귀안(鬼眼)이라고 불렸던 적이 있었다. 지모(智謀)와 신산귀계(神算鬼計)로 많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아내 신주귀안(神珠鬼眼)이라고 불리우며, 마주한 사람의 마음까지 읽어 낸다던 그 눈은 이제 없었다.


"노부들의 복수심이나 한(恨)을 풀고자 함이 아니네. 우리 모두를 위하고 우리 후대를 위한 것이네."

그의 어조는 부드러웠지만 설득력이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그의 말에 무조건 설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백가촌의 촌장인 공손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인사 외에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처음으로 떼었다.

"일전에 백결(柏缺)이란 사람이 왔다 갔습니다. 저로서는 그 사람에게 했던 말 이외에는 어르신들께도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을테니 일찍 쉬시지요."

그의 완강한 태도에 세 노인은 쉽게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런 일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설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을 대하는 그의 모습에는 자신들을 향한 것이 아닌 기이한 긴장감도 느낄 수 있었다.

오른 다리를 길게 늘이고 앉아 있던 노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마 본래의 오른 다리 대신에 의족(義足)을 한 관계로 구부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백가촌에 무슨 일이 있는가?"

공손벽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떡였다. 아마 자신의 모습에서 노인네들은 뭔가를 느꼈을 것이다. 노련한 경험과 연륜은 머리로 배운 것 보다 정확하다. 그들의 의문에 공손벽이 대답하기 전에 밖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촌주(村主). 그들이 왔소."
"알겠네."

공손백은 대답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세 노인에게 공손히 포권을 취했다.

"어르신들께서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편하게 쉬십시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공손했다. 그런 모습이 노인들에게는 더욱 부담스러웠다. 그런 태도는 식구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손님을 대하는 태도다. 식구라면 아무리 멀리,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가 돌아와도 이런 모습으로 대하지는 않는다.

"무슨 일이기에 저러는 걸까?"

세 노인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분명 무슨 일인가 있는 것 같았다. 의족을 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노인 중 가장 성질이 급한 사람이다.

"나가 보는게 좋겠소."

-----

"내놓지 않겠다? 그렇다면 빼앗아 가야지. 흐흐..."

횃불을 든 마상 위의 인물은 매부리코에 쭉 찢어진 눈을 가진 잔혹하게 생긴 인물이었다. 그의 주위로 이십여명이 말을 탄 채 능글맞은 괴소를 흘리고 있었다. 일견 보기에도 이들은 비적(匪賊)들이었다. 길이가 짧아 겨우 가슴께만 가리는 붉은 동의(胴衣)를 일제히 겉에 걸친 그들은 한눈에 봐도 국경지역을 넘나들며 노략질을 일삼는 비적들 무리였다. 더구나 한족뿐 아니라 몽골족이나 여진족(女眞族)까지 뒤섞여 있는 것으로 보였다.

"대신 추수한 쌀 삼십석을 더 드릴 터이니 대주(隊主)께 말씀 좀 잘 드려주시오."

조금 전과는 달리 공손벽은 머리를 연신 조아리며 비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십여 명의 남녀가 있었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불만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우리는 여자가 부족해... 여기 외에는 쓸만한 여자가 없어. 대주가 결정한 일이야."

서툰 한어였지만 매부리코 옆에서 느긋이 주위를 둘러보던 거구의 사내가 말했다. 아마 이 일행의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는 팔뚝을 그대로 내 놓은채 맨 갑옷만을 걸치고 있었다. 어깨 근육과 팔뚝이 어린애 머리통만 했다.

"제발 봐 주시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은 안된다고 하지 않았...소? 억...!"

공손벽의 말이 끝나기도 매부리코 인물이 채찍으로 공손벽의 어깨를 내리쳤다.

쨕--- 쨕--

공손벽의 옷이 금세 너덜거리며 찢어진 옷 사이로 핏기가 비쳤다. 채찍은 매서웠다. 두 대를 내리쳤을 뿐이지만 뼈를 파고드는 고통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백가촌은 그동안 많이 봐주었지. 이제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가 되겠어."

매부리코 인물은 더 이상 때리지는 않았지만 채찍을 땅바닥에 내리치면서 위세를 보이고 있었다. 언제라도 채찍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그 동안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공물을 준비해 드렸소. 처음부터 사람만 아니라면 우리가 굶더라도 뭐든 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소?"

"도대체 말이 안통하는군. 적랑대(赤狼隊)의 대주가 결정한 일은 번복되지 않는다. 꽤 똑똑한 친구같은데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나? 본대는 아무도 살려두지 않는다. 백가촌은 지금까지 예외였어."

매부리코 인물은 분명 한인(漢人)이었다. 공손벽이 그에게 매달리는 것도 같은 동족으로서 최소한의 인정을 바랐다. 하지만 매부리코 사내는 오히려 다른 인물들보다 더 공손벽을 핍박하고 있었다. 마치 맡겨놓은 물건을 달라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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