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斷腸記)- 111회

등록 2005.02.02 07:37수정 2005.02.0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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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 장 백가촌(百家村)

“왜 이러시는지 알 수 있겠소?”


금적수사의 얼굴은 창백했다. 단전이 파괴되어 공력을 상실한 이후로 그는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더구나 철혈보가 어떤 조직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지금 용케도 피해 다닌다. 하지만 조만간 그들은 자신을 추적해 올 것이고 자신은 그들에게 잡힐 것이다.

“무엇을 말인가?”

그런 마음을 모르는지 섭장천은 언제나 얼굴색 하나 변함이 없다. 섭장천의 일행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저들이 하나같이 무시 못 할 고수들이고 또한 무엇을 믿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철혈보는 그들이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다. 반드시 추적해 올 것이고 그 결과는 예전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벌써 섭노 선배가 이 후배 부부를 보호해 주신 지 한 달이 넘었소. 아무런 요구도 없었고 강요하지도 않았소. 더 더욱 모두가 노리는 오룡번을 달라든가 빼앗으려 하지 않았소.”

“그게 이상한 일인가?”


“물론이오. 이상해도 아주 이상한 일이오. 어떤 일이든 대가 없이 손해만 보고자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소.”

성하검 섭장천은 지광계를 빤히 바라보았다.


“자네가 철혈보에서 오룡번을 빼내 달아날 생각을 했다면 분명 자네에게는 치밀한 계획이 있었을 거야. 오룡번의 무학이 불완전하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고, 또한 그것을 이백여년에 걸쳐 철혈보에서 보완해 왔다는 사실도 알았을 뿐 아니라 그 보완된 내용도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네.”

금적수사 지광계는 어이없는 표정을 떠올렸다. 이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생각한 것, 자신이 하고자 했던 계획마저도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제는 상관없었다. 이미 단 한번의 오판으로 모든 계획이 망가져버린 지금 그들이 알고 있다 해도 별 문제는 아니었다.

“자네는 철혈보에서 나와 오일 동안 누구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졌다가 모습을 보였네. 우리도 나중에야 자네가 오랜 시일을 두고 준비한 촌가(村家)가 있었음을 알았네만 왜 자네는 좀더 빨리 철혈보의 영역을 벗어나야 했는데 그곳에서 오일씩이나 머물고 있었을까?”

섭장천의 음색은 언제나 똑같아서 듣는 이로 하여금 지루하다는 생각을 들게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상대를 더욱 긴장시키게 하는 묘한 작용을 하고 있었다. 더구나 음정의 고저가 뚜렷하지 않고 나직해서 신경을 써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무슨 말을 했는지 빨리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긴장하게 만드는 요인 같았다.

“중원에서 두뇌가 뛰어난 인물을 꼽자면 열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자네라면 분명 이유가 있었을 거야. 노부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테지만 자네는 물론 가능했던 일이지.”

“......!”

“자네는 그것을 머리 속에 다 넣어 두었겠지. 어차피 자네의 능력으로는 오룡번을 끝까지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게야. 오히려 기회를 보아 오룡번을 누구에겐가 넘기려고 생각했을 테지. 그 대상이 구파일방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철혈보에게라도 되돌려주면서 흥정할 생각도 할 수 있었겠지.”

지광계는 체념하고 있었지만 본래 그가 가지고 있던 버릇을 버리지는 못했다. 몸은 비록 망가졌지만 그의 두뇌만큼은 아직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읽어내는 섭장천에 대해서 일종의 승부욕이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포기했다.

“하지만 자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파일방에서는 오룡번을 원하지 않았네. 자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지. 자네가 장안루에 굳이 가겠다고 한 것은 아마 그 쪽의 인물을 만나러 간 것으로 생각하네. 하지만 상대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 오룡번은 구파일방에게 계륵(鷄肋)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차피 오룡번은 철혈보의 것이다. 그것을 구파일방이 차지하려 든다면 어쩔 수 없이 철혈보와 다투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장안루에 나타난 철혈대주가 진짜이든 가짜이든 회수한 오룡번을 없애는 것으로 보아 오룡번을 차지한다 해도 결국 전 무림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라도 없애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들인 노력과 피는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구파일방이라 할지라도 오룡번을 가지고 있으면 편할 날이 없다. 아무리 구파일방이라도 전 무림과 등을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구파일방이 오룡번의 행방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이유였다.

“자네가 기다린 그 친구는 중원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벌써 사개월이 흘렀네. 그는 연락을 받지 못한 것이지.”
“그 친구가 누구라는 사실까지도 알았던 것이오?”
“노부뿐 아니라 아마 철혈보에서도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네.”
“그 사실까지 알면서도... 철혈보가 장안루에 나타날 것까지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후배 부부를 장안루에 가는 것을 허락했었단 말이오?”
“균달이라는 친구가 마침 나타난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지.”

알 수가 없었다. 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 이 후배가 오룡번의 내용을 구술해 드리면 되겠소?”
“글쎄... 노부는 처음부터 오룡번에는 관심이 없었네.”

전 무림이 동요하고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오룡번에 관심이 없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아무리 한때 천하제일검의 명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해도 초연할 수 있을까?

“그럼 그 보완된 내용이오? 오룡번을 보완한 철혈보의 근간을 이루는 무공을 원하는 것이오? 도대체 저에게 원하는게 무엇이오?”

섭장천은 지광계의 말에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하지만 그는 지광계의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단호한 어조로 말을 밷았다.

“노부는... 아니 분명히 하지. 우리는 자네가 필요하네.”

그의 말에 지광계는 뜻밖인 듯 섭장천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인물이, 아니 그의 말대로 이 인물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단전이 파괴되어 아무 쓸모도 없는 자신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오룡번의 내용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원하고 있다니...

“우리라면...?”

“자네가 우리 속에 섞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네.”

“이미 섭노 선배도 알고 있듯이 단전이 파괴되어 아무 쓸모없는 몸이오.”

“물론 알고 있네. 하지만 공력을 되찾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섭장천의 말에 지광계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단전(丹田)이란 몸의 그릇이다. 진기(眞氣)가 생성되는 발원(發源)이고, 전신을 도는 진기(眞氣)가 다시 돌아와 모여 쌓이는 보고(寶庫)다. 생성되는 곳이면서 축적되는 곳이 파괴되어 없어졌는데 어떻게 공력을 되찾는단 말인가?

지광계의 얼굴에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떠오르자 섭장천은 자신의 장포를 걷어 올리고 단삼을 젖히며 자신의 아랫배를 보여 주었다.

“억---!”

지광계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 파괴된 단전이다. 자신은 겉에 흉터가 별로 남지 않았지만 섭장천의 단전은 불에 탄 듯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자네가 보기에 노부가 공력이 상실된 것으로 보이나?”

아니다. 섭장천은 전혀 이상이 없다. 아마 보지 못했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단전이 파괴되어 공력을 상실했지. 하지만 진기란 기이한 것이어서 단전이 파괴되어도 몸 밖으로 사라지지는 않아. 단전이 파괴되면 진기를 운용을 할 수 없을 뿐이지.”

진기를 운용 못한다는 것은 곧 무공을 펼치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특별히 다를 것은 없다고 지광계는 생각했다. 하지만 단전이 파괴된 사람이 지금 눈 앞에 있고, 그는 공력을 운용하고 있다.

“단전이 파괴된 인물 몇명이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진기를 운용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 그리고 이십년만에 그 방법을 찾아냈지.”

“어떻게.....?”

“부작용은 있네. 일년에 한 달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극심한 고통 속에 보내야 하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지만 상실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지광계의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일과,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누군가에게 철저하게 이용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자의 예측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오룡번을 훔쳐 달아날 생각을 한 것은 자신과 그의 아내였지만 그 뒤에 일어난 모든 일은 그 누군가가 의도한 계획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지광계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창 밖에서 스며드는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자신도 역시 마찬가지고, 오룡번을 차지하기 위해 몰려들었던 군웅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전 무림이 그 누군가에게 철저하게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우연히 일어난 사건을 이용해 전 무림을 상대로 자신이 의도한 대로 만들어갈 수 있는 인물이라면 상상하기도 싫은 인물이다.

그런 자라면 철혈보를 상대로 자신을 지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공력 역시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섭장천의 말대로 일 년 중 한 달간의 고통이면 어쩌랴! 상실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악마의 속삭임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철저한 절망과 체념에 빠진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섭장천이 말하는 그 하나뿐이었다. 아마 옆 방에서는 자신의 아내 역시 오독공자의 아내인 적미갈(赤尾蠍) 상교교(尙嬌嬌)에게 설득당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마침내 몸도 마음도 모두 굴복했다.

“이 후배가 어떻게 하면 되오?”

그 말을 들은 섭장천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금적수사는 철혈보의 서열 육위였던 인물이다. 철혈보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 사실 하나로 그는 오룡번보다 더 귀중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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