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없어도 신호등은 지키는 거야"

신호등과 작은 균열

등록 2005.02.17 20:41수정 2005.02.2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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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가를 벗어나서 산길로 접어드는 횡단보도를 건널 때였다.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곳이어서 그랬는지 승용차 두대가 신호를 무시한 채 전속력으로 달려오다가 급하게 손을 들어 저지하자 마지 못해 속도를 줄이고 급정거했다.

화가 났지만 그 정도야 흔히 경험하는 일이기도 해서 크게 개의치 않고 다시 길을 건넜다. 이번에는 반대쪽에서 승용차 한대가 나를 빤히 보면서도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돌진해 왔다.

조금 걸음을 빨리해서 걷든지 뛰기라도 하면 차를 피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분명 파란 불이 켜져 있었다. 그 승용차 운전자는 왼편에서 온 차량에 비해 바뀐 교통신호와 보행자를 확인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나는 당연히 속도를 줄이고 차를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차는 멈춰 섰지만, 황당하게도 차 주인은 어서 길을 비키라는 듯 경음기를 마구 눌러댔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 나는 손가락으로 파란 신호등을 가리키며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자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아니, 그럴 참이었다. 그런데 실상 나와 눈이 마주친 것은 조수석에 앉아 있는 앳되고 선한 눈매를 가진 여자아이였다.

열다섯, 혹은 열여섯 남짓 되어 보이는 그 아이는 안타깝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보아서 그랬는지, 상처를 입은 듯한 그 아이의 눈빛이 오랫동안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오래 전 동료교사의 승용차를 얻어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옆 차선의 차 주인이 캔 음료를 마시고는 스스럼없이 차창 밖으로 빈 캔을 던지는 장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옆 좌석에는 남자의 아들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앉아 있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철렁했다. 그 아이의 손에도 캔 음료가 들려 있었고 음료를 마신 뒤의 행동은 차 주인과 동일했다. 그때 나는 혼잣말처럼 이런 말을 중얼거린 기억이 난다.


“최소한 저 아이는 아버지의 몰상식한 행동에 상처를 받지는 않겠구나.”

만약 그 아이가 아버지의 행동을 따라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아이를 걱정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아이는 제 아버지와 붕어빵이었던 것이다.


상처를 받는 게 좋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부모의 몰지각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과 그런 부모로 인해 상처를 받는 것 중에서 아이에게 어느 편이 더 희망적인지는 한 번 따져볼 일이다. 순결함이 없으면 상처도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나는 그 여자아이의 애처로운 눈빛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안하무인인 제 아버지를 닮지 않은 아이. 그것이 귀해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하여 그 일로 인해 상처 받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겠지만, 그 반대의 심리가 작용했을 수도 있었다. 그 아이가 상처받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는지도. 왜냐하면, 그것이 그 아이에게 더 희망적이니까.

파국은 작은 균열에서 온다. 수능시험 부정사건을 통해 우린 이미 파국의 일단을 경험한 바 있다. 그럼에도 그 일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신호등 위반이라는 작은 균열을 쉽게 생각하는 버릇도 여전하다.

백마디 말보다도 소박한 실천이 아쉽다. 신호등 앞에서 아버지와 딸이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희망적일까?

“아빠, 왜 안 가고 서 있어요?”
“빨간 불이잖아.”
“사람도 없는데 뭐.”
“사람이 없어도 신호등은 지키는 거야.”
“맞아, 우리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향신문> 교단일기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경향신문> 교단일기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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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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