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절대 삶에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시보다도 더 아름다운 제자의 안부 편지

등록 2005.02.06 14:10수정 2005.02.06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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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를 좀 써볼까 하고 궁리중입니다. 게으름을 피우다보니 너무 오랫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거기에 지난해에는 담임을 맡지 않아 아이들에게 써주는 생일 시조차 한 해를 꼬박 쉬었더니 언어에 대한 감각도 많이 떨어진 듯하여 조바심까지 나던 터였습니다.

해서, 올해는 작심을 하고 컴퓨터에 시방까지 마련하여 시상이나 시구가 떠오르면 일단 시방에 들어가 단상이라도 적어놓곤 합니다. 그것이 시로 무르익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오늘도 아침 기도를 마치고 곧바로 컴퓨터를 켜고 시방으로 들어갈 요량이었습니다. 열흘 전쯤 아파트 벽면에 세워진 이삿짐센터 고공사다리를 보고 시상을 정리하여 웬만큼 시 모양을 갖추어 놓은 시를 다시 불러내어 손질을 해볼 생각이었지요. 아직 제목도 정해지지 않은 미완성 시의 초라한 행색이 이렇습니다.

아파트 벽면에 길게 세워진
고공사다리를 볼 때마다
수직을 오르내리는
수평 받침대에
눈길이 가곤 하지.

한 조각의
저 수평이 없다면
수직의 상승만으로는
냄비 하나도
들어올릴 수 없지.

하늘을 찌를 듯한
아스라한 높이를 오르내리는
현대식 최신 장비라도
수평이 무너지면
끝장나는 거지.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한 평 남짓한
저 평평함이 없다면
바닥이 없다면
쓸모가 없는 거지.


이 시에서 '수평'이란 개념을 현실의 삶 속에서 좀 더 구체화하고 싶은데 그러다보면 자칫 시가 설명조로 흘러 긴장이 떨어질 것 같고, 그렇다고 이대로 두자니 실험관 속의 언어처럼 하나의 관념이나 착상으로만 머무는 것이 또 그렇고 하여,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해줄 마지막 연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중에 오늘 제자로부터 시보다도 더 아름다운 안부 편지를 받았습니다. 시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메일을 열어보았는데 '꼬마시인'이라는 반가운 닉네임이 얼른 눈에 띄었습니다. 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이. 그래서 당연히 저도 딸처럼 여기고 담임을 맡은 것이 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요즘도 가끔씩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내주기도 합니다.

지난해에도 저에게 크게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렵사리 대학에 입학하여 겨우 1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하겠다고 하여 왜 그렇게 의지가 약하냐고 나무랐던 것이지요.

혼자의 힘으로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해야 하는 딱한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행여 그런 자신의 처지를 핑계삼아 마음이 약해진 것은 아닌가하고 야단을 친 것인데, 그것이 오히려 고마웠던지 긴 편지를 보내와 제 눈물샘을 자극했습니다.


부모가 이혼하고 두 분 모두 재혼을 하는 바람에 발을 내딛고 설 바닥이 없어 늘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아픔이 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세상의 위태로운 허공 위에서도 안심하고 발을 내딛을 만한 한 조각의 평평한 받침대를 마련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적인 도움이 어려우니 마음으로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이가 보내온 편지를 읽고 난 뒤에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제 딸이 보내온 안부 편지입니다.

아버지
지금 일하는 중에
아버지 생각나서 이렇게 이메일 보내요.

길게 곱게 써드리고 싶은데
일하는 중이라서
급히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역시 보람이 밖에 없죠?
이제 좀 바쁘게 살까하고 일을 구했어요.
저 이번 학기에는 복학이 힘들 것 같아요.

이해 좀 해 주세요.
저 아버지 생각해서라도 빨리 복학할게요.
일단 제 마음이 편해야 학교에 가도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
제가 나이 한 살 더 먹으면
나아질 것 같았던 생활이
더 꼬여가네요.

나중에 얼마나
더 행복해지려고 이러는지
지금은 친구 집에서
일을 다니고 있어요.

이 정도로 제 안부와
현황 말씀드리는 거예요.
아버지!

그래도, 저 이렇게 복잡하고 힘들고
어렸을 때처럼 마음 못 잡을 정도로 괴로워도요
이제 절대 삶에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그건 누구보다 보장할 수 있어요.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사랑이
아직 마음에 가득 남아 있어요^^

아버지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말 하려고 이메일을 썼는데
제 안부를 자세히 알고 싶어하셔서
이렇게 적게나마 썼어요.

며칠 전에
김회일 선생님과 만났어요.
선생님께서 밥도 사주시고
칵테일도 먹고 좋은 시간 좋은 이야기 나누었어요.

아버지하고도 조만간
그런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딸이 밝게 웃을 수 있는 그날이 오면
아버지께 제가 먼저 달려갈게요.

딸 믿으시죠?
김지혜 선생님도 너무 뵙고 싶네요.
스승의 날은 밝게 못 웃어도 학교 올라갈게요^^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마시구요.
건강하시고 새해엔 더 좋은 글 쓰세요.
좋은 사랑 하시구요.

화이팅~
아셨죠?
또 메일 보낼게요.

아버지
한 해가 가고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게 변해가도
아버지를 향한 딸의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어요.

아시죠?
사랑해요 아버지
그냥 어깨 쭉-핀 아버지 보고 싶을 뿐이에요.
항상 건강하세요.

전 아버지 믿고 언제나 마음 한켠에
아버지 응원하는 딸이라는 거
아시죠?

그럼 그렇게 알고 저는 이만,^^


편지를 다 읽고나자 머리에 떠오른 그림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아파트 벽면에 길게 세워진 이삿짐센터 고공사다리였습니다. 위태위태한 허공 위에서도 안전하고 반듯하게 물건을 실어 나르는 수평받침대가 눈에 선했습니다.

그 튼실하고 안전한 수평받침대를 제 딸아이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그러니 이렇게 당차게 말할 수 있었겠지요.

'이제 절대 삶에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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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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