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됐다 해도 절반의 성공 아닌가?

교육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이 중요하다

등록 2005.02.01 08:58수정 2005.02.0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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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미래다.'

며칠 전, 국내 유력한 두 방송사가 공동 제작하여 공동 방영한 교육프로그램의 제목이다. 총 3부로 방영된 이 프로그램을 나는 오전 내내 채널을 돌려가면서 공평하게(?) 시청했다.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교육문제를 비중 있게 다뤄준 두 방송사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화면 왼편 상단에 써진 방송 제목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왜 그랬을까? 사실, '교육은 미래다'라는 제목은 교육프로그램의 제목으로서는 무난한 편이다. 아니, 좀더 후한 점수를 줄 수도 있다. 최소한 시비를 걸 만한 논쟁적인 제목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수백억짜리 로또복권이라도 당첨된다면 몰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교육이다. 지구본에서 보면 얼른 찾기가 힘들 정도로 작은 땅을 가진 나라가 무역량 세계 12권을 자랑하는 결코 작지 않은 나라가 된 것도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교육 투자를 통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교육은 미래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한 아이 꿈은 의사다. 그가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6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거기에 인턴, 레지던트 과정까지 포함하면 대략 25년이 걸린다. 아이는 25년 후에야 의사가 된다. 그 삶의 유예기간이 더 이상 길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단 한 번의 시행착오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런 변수까지 감안한다면 평균 서른다섯 살이 되어서야 전문의가 될 수 있다.

이쯤해서 나는 내 상식에 의문부호를 붙이고 싶다. 의사가 되는 것이 꿈인 한 아이는 그 미래의 삶을 위해 거의 반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고스란히 바쳐야 한다. 교육이 미래라면, 교육이 미래를 위한 투자라면, 그가 바친 서른다섯 해의 생애가 자신의 신분상승과 미래의 행복을 위한 투자라면, 의사가 되기 전까지의 절반에 가까운 그의 삶은 과연 무엇인가? 의사가 되기 위한 밑거름일 뿐인가? 그렇다면 기껏 절반의 성공이 아닌가?

또 이런 물음도 생긴다. 그의 절반의 삶이 그 자체의 고유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의사가 되기 위한 투자기간으로 종속적인 가치만을 지닌다면 그의 나머지 절반의 삶도 온전할 수 있을까? 그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한 의사답게 그가 매일 만나는 환자들을 생명으로 대할 수 있을까? 그는 혹시 그가 투자한 절반의 삶에 대한 보상이나 대가를 지불받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하긴, 요즘 같은 세태라면 '그거 당연한 거 아니냐?'고 오히려 반문할 법도 하다. 가진 자로서의 사회에 대한 봉사나 책임의식 같은 것을 얘기하면 '왜 내가 애쓰게 벌어서 남 좋은 일 시키느냐?'고 따지기도 할 것이다. 사실 그 말을 반박하기도 어렵다. 학창시절 부모나 학교 교사에게 이런 말을 자주 들어온 사람이라면 더욱.


"지금 세상은 전쟁이야. 취업전쟁이라는 말도 있잖아. 이 적자생존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너 대학에 가면 실컷 놀 수 있잖아. 그때까지만 꾹 참고 공부해라. 의사만 되면 이 세상에서 무엇이 부럽겠니? 너에게 시집오겠다는 여자들이 줄을 설 텐데. 연애는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아.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솔직히 의사가 좋지 막노동꾼이 좋냐? 지금 좀 고생하더라도 네 미래를 생각해야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아쉽기 짝이 없다.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부모나 교사들이 이렇게 말을 해주었다면 그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너 지금 행복하니?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더라. 한 번 즐겨봐.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해야 머리에도 잘 들어올 테니까, 일석이조잖아. 넌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자랐어. 공부하고 싶어도 가정환경 때문에 대학을 포기하는 사람도 많아. 나중에 돈을 많이 벌거든 장학금도 내놓고 어려운 사람도 많이 도와주고 그래라. 그것이 배운 사람이 할 몫이야. 그러려면 좀 힘들어도 열심히 공부해야겠네? 아참, 아직 대답 안 했다. 너 지금 행복하니?"

이런 말을 자주 듣고 자란 아이들이 수능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잠을 자는 시간을 빼고는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하면서도 왜 공부하는지 그 이유를 물으면 갑자기 벙어리가 되고마는 답답하고 이상한 아이들은 되지 않을 것이다. 새순처럼 푸르고 어린 나이에 우울증을 호소하고 행복의 원천을 잃어버린 불행한 아이로 커 가지도 않을 것이다.

두 방송사가 합작하여 3부까지 내보내야할 정도로 심각하고 복잡한 교육문제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해법이 아주 간단할 수도 있다. 학교를 즐거운 곳으로 만드는 일이다.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대통령이 걱정하는 나라의 경제도 바르고 튼실하게 자란 똑똑한 아이들이 알아서 챙길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어볼 일이다. 먼 미래가 아닌 지금 당장.

"너 지금 행복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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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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