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녹색 피라미드 (35회)

등록 2005.02.18 16:10수정 2005.02.18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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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와 도로로 내려오자 멀리서 택시 한대가 곧바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주위의 안개가 얼마나 짙은지 헤드라이트 불빛이 간신히 기둥이 되어 두꺼운 연막층을 뚫고 있었다. 채유정이 뛰어가서 택시를 잡았다. 뭐라고 흥정을 한 그녀가 소리를 쳤다.

"됐습니다. 올라타세요."


택시 기사는 얼굴 표정이 밝았다. 채유정이 요금을 두배로 준다고 해서 무순까지 택시를 대절 시킨 것이다. 김 경장이 택시비를 채유정에게 주려 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이건 수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 일입니다."

김 경장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자정을 막 넘은 시간이었다. 택시는 차가 전혀 보이지 않는 길을 부지런히 달려 두시간 만에 무순에 도착했고, 거기서 한시간을 더 달려 장당에 도착했다.

"택시를 기다리게 할까요?"

"아무래도 오래 걸리지 않을까요?"


둘은 택시를 돌려보내고 근처를 둘러보았다. 시각은 새벽 3시를 넘기고 있었다. 멀리 화력 발전소에서 엷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을 뿐,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이 근처에서 가장 높은 곳이 어디일까요?"


채유정이 집에서 가져 온 책을 꺼내어 들었다. 고조선 유적에 관한 책이었다. 그 책을 얼굴 가까이 들여다보던 그녀가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 고이산이 있고 거기에 산성이 하나 있어요."

"산성이라면?"

"고구려 시대 때에 만들어진 산성입니다. 그 산성이 있는 산이 이 근처에선 가장 위치가 높은 것 같아요."

둘은 고이산으로 한참 동안 걸어갔다. 택시를 먼저 보낸 것이 후회되었다. 이 새벽에 지나다니는 차는 한대도 보이지 않았다. 순전히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산성 입구에는 낡아서 땅바닥에 쓰러진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산성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어야 할 표지판은 녹이 쓸어서 벌겋게 부식되어 글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돌층계를 밟으며 옛 성의 정상을 향했다. 산성의 정상에는 거대한 불탑이 보였다. 이른 새벽이라 산을 오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산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5시가 넘어 있었다. 하지만 해가 뜨려면 아직 1시간은 더 기다려야만 했다.

채유정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물었다.

"여기서 두 교수가 확인하려는 것이 보일까요?"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여기서 보였다면 그들이 굳이 비행기를 타려고 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순 없죠."

그러는 동안 서서히 먹물 같은 어둠이 풀어지며 동쪽의 평원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비쳐들기 시작했다. 사위가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둘은 눈을 부릅뜨고 밑을 내려다 보았다. 하지만 안개가 잔뜩 끼어 잘 보이지 않았다. 짙은 안개가 넓은 평원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오른편의 석탄 공장에서 검은 석탄 연기까지 피워 올려 시야는 더욱 희뿌옇기만 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안개가 조금 걷히는 듯했다. 둘은 유심히 평원 쪽을 살폈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곳은 없었다. 채유정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가서 봐야 할 것 같아요."

여기보다 더 높은 곳은 불탑밖에 없었다. 불탑은 그 높이가 건물 10층은 족히 보였다. 둘은 불탑 옆에 난 계단을 이용했다. 원래 출입을 막아 놓았지만 지키는 사람이 없어 둘은 쉽게 오를 수 있었다. 계단은 탑의 중간까지만 이어져 있었다. 그 계단에 서서 공안이 지키고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옅은 안개 사이로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몇 안되는 작은 집들이 말굽쇠 모양으로 서남 방향으로 모여 있고, 일망무제로 퍼져 있는 초원과 크고 작은 산봉우리의 무리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봉우리들은 평원 사이사이로 점점이 흩어져 펼쳐져 있었다. 그 부근을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유적으로 보이는 곳은 찾을 수 없었다. 대게 유적지는 땅을 파놓아 벌건 황토 빛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보아도 푸른 초원의 빛깔만이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김 경장은 실망한 채 팔짱을 끼며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의 예상이 틀린 것인가?"

하지만 채유정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발 밑에 펼쳐진 곳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한참의 시간이 지나 그녀도 지쳤는지 한숨을 내쉬며 옆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잘못 생각한 것 같네요."

둘은 아쉬움과 미련이 남아 쉽게 탑을 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탑 밑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러대었다.

"어서 내려와요."

탑을 지키는 관리인 듯했다. 둘은 할 수 없이 내려와야만 했다. 채유정은 계단 손잡이를 잡고 내려서면서도 미련이 남아 한참 동안 평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며 다시 탑 위로 후다닥 뛰어갔다.

"이봐요."

김 경장이 불렀지만 그녀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밑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탄식을 내지르는 것이다.

"이럴 수가……."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리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눈주름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입에서 감꽃 같이 말이 가늘게 새어나왔다.

"설마…… 설마…… 저것들이."

하는 말과 동시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의 얼굴빛이 홍시빛으로 말갛게 달아 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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