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집도 태우고, 꽹과리치는 도올 선생도 보고

'온동네가 들썩들썩' 낙안읍성 달집 태우기 현장

등록 2005.02.24 01:43수정 2005.02.2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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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남성이라면 달은 여성을 의미한다. 다산과 만복을 의미하는 보름달은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땅과 달을 여성으로 여긴 것은 오랫동안 전해온 지모신의 생산력 관념에서 나온 것으로 대보름 행사는 부락민들의 집단적인 어울림의 축제라 표현할 수 있다.


a 낙안 농악대의 한 여성 단원이 꽹과리를 치고 있다. 보름달이 여성을 의미하듯 보름달 같은 둥근 꽹과리는 그녀의 경쾌한 손놀림에 신이 난 듯 흥겨운 음을 쏟아내고 있다

낙안 농악대의 한 여성 단원이 꽹과리를 치고 있다. 보름달이 여성을 의미하듯 보름달 같은 둥근 꽹과리는 그녀의 경쾌한 손놀림에 신이 난 듯 흥겨운 음을 쏟아내고 있다 ⓒ 서정일

어느 마을이나 마찬가지로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농악대의 몫이다. 지난 23일 대보름날, 마을회관에서 출발한 농악대는 온 마을 사람들에게 축제가 열렸음을 알리고 낙안읍성으로 들어온다. 가락이 빠르며 쇠가락이 발달된 좌도농악의 특징답게 힘차고 경쾌하게 동문을 통과한 농악대는 액운을 몰아내는 힘찬 굴림으로 땅의 이곳 저곳을 밟아가면서 정월 대보름 축제 한마당이 벌어지고 있는 객사 앞 넓은 공터로 향한다.

a 낙안농악대임을 알리는 커다란 깃발과 꽹과리, 징, 북, 소고 등 제각각의 역할에 맞는 악기를 든 농악대가 동문을 통과하여 행사장으로 향하고 있다

낙안농악대임을 알리는 커다란 깃발과 꽹과리, 징, 북, 소고 등 제각각의 역할에 맞는 악기를 든 농악대가 동문을 통과하여 행사장으로 향하고 있다 ⓒ 서정일

행사장을 준비하는 관리사무소 직원들과 보존회 회원들은 농악대가 오기 훨씬 이전부터 놀이마당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줄다리기를 위해 공터 한편에 길게 늘어 놓은 동아줄하며 윷놀이, 투호, 제기차기 등 참여한 사람들에게 좀 더 흥겨운 마당을 제공하기 위해 놀이기구 하나 하나에도 세심한 신경을 쓴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a 대보름 행사에 참가한 한 여인이 달집태우기 행사를 위해 높게 세워 둔 짚단에 한지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라고 쓴 종이를 곱게 접어 새끼줄에 동여매고 있다

대보름 행사에 참가한 한 여인이 달집태우기 행사를 위해 높게 세워 둔 짚단에 한지로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라고 쓴 종이를 곱게 접어 새끼줄에 동여매고 있다 ⓒ 서정일

일찌감치 마련된 달집태우기에 사용될 커다란 짚단은 새끼줄로 칭칭 감겨져 있다. 하나 둘 소원지가 늘어나더니 본격적인 행사가 진행되기도 전에 이미 누런 짚단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공부 잘하게 해 달라는 소원에서부터 낭군 만나게 해 달라는 애교 섞인 글까지…. 하지만 둘러 보면 대부분 가족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가족 사랑의 글로 가득 메워져 있다.

a 인근 마을에서 오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따뜻한 양지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농악대의 몸놀림과 놀이마당에서 진행되는 각종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인근 마을에서 오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따뜻한 양지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농악대의 몸놀림과 놀이마당에서 진행되는 각종 행사를 지켜보고 있다 ⓒ 서정일

낙안읍성은 그리 크지 않은 면적이다. 하지만 동내리, 서내리, 남내리라는 세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어 예전엔 마을끼리 승부의식이 대단했다고 한다. 특히 이런 마을 단위의 축제라도 열리는 날이면 서로의 단결력을 과시라도 하듯 승패를 끝까지 보려 했다고 한다. 마을 사랑이 대단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들돌 들기, 줄다리기에선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고 한다. 만약 그 정신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낙안읍성이 허물어졌을 거라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이들도 있다. 승부 의식이 강했던 만큼 축제가 재미있었다는 얘긴데 그런 면에서 요즘 축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a 행사장 한편에 천막을 치고 낙안읍성 보존회 회원들이 며칠 전부터 준비한 술과 음식을 손님들에게 푸짐하게 대접하고 있다

행사장 한편에 천막을 치고 낙안읍성 보존회 회원들이 며칠 전부터 준비한 술과 음식을 손님들에게 푸짐하게 대접하고 있다 ⓒ 서정일

어느 곳이든 푸짐한 먹거리가 있어야 손님 대접을 잘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며칠 전부터 낙안읍성 보존회 회원들은 오실 손님들을 위해 음식 준비에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잔칫상엔 꼭 고개를 내미는 돼지머리 고기하며 각종 나물들이 막걸리와 함께 관광객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 주고 있다. 몇 번씩 손을 내밀어도 흔쾌히 담아주는 음식, 풍성한 보름달을 닮은 후덕한 남도의 인심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a 가장 큰 행사인 줄다리기를 위해 관리사무소 직원들과 보존회 회원들이 암줄과 숫줄로 나눠진 동아줄을 끼워 맞춘 후 커다란 통나무로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있다

가장 큰 행사인 줄다리기를 위해 관리사무소 직원들과 보존회 회원들이 암줄과 숫줄로 나눠진 동아줄을 끼워 맞춘 후 커다란 통나무로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있다 ⓒ 서정일

먹었으니 힘을 쓰라는 말인지 어느 틈엔가 암줄과 숫줄로 나눠진 동아줄이 연결되어 있다.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재미를 간직한 줄다리기는 관광객들이 참여하는 의미 있는 경기가 되었다. 동쪽이 이겨야 좋다는 옛말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나이 드신 분들은 내심 동쪽을 응원한다. 아무리 참여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젖먹던 힘까지 다 쏟았는지 끝난 줄다리기 행사장은 움푹 움푹 패여 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엔 같은 편에 섰다는 것만으로도 연대 의식을 느끼는 듯 자신이 속한 곳이 이겨야된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 모양이다.

a 낙안읍성 중앙부에 있는 임경업 장군 비각에서 마을 주민들이 금줄을 쳐놓고 제사 음식을 준비하여 임경업 장군에 대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낙안읍성 중앙부에 있는 임경업 장군 비각에서 마을 주민들이 금줄을 쳐놓고 제사 음식을 준비하여 임경업 장군에 대한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 서정일

줄다리기가 끝나기 무섭게 임경업 장군 비각에선 추모제가 열린다. 낙안읍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선정을 배푼 임경업 장군을 잊지 못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마련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전통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옛 모습 그대로다. 비각을 중심으로 금줄을 치고 입구 바닥엔 황토를 깔아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정갈하게 치러진다. 힘찬 줄다리기 뒤라서 그런지 추모제는 한층 더 경건해 보인다.


a 농악대를 선두로 횃불을 하나씩 손에 들고 마을 주민과 관광객들이 가정의 행복을 기원하면서 낙안읍성 성곽을 돌고 있다

농악대를 선두로 횃불을 하나씩 손에 들고 마을 주민과 관광객들이 가정의 행복을 기원하면서 낙안읍성 성곽을 돌고 있다 ⓒ 서정일

하나 둘 행사가 마무리 되어 갈 즈음 기다란 장대에 솜을 뭉쳐 만든 횃불에 불이 당겨진다. 하나씩 받아든 횃불의 열기로 인해 얼굴이 화끈거린다. 성곽을 돌아 내려와서 그 불은 다시 달집태우기에 사용될 것이다. 소중하게 들고 한발 한발 내 딛는 발걸음엔 근심과 걱정을 덜어 버리려는 듯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맞이하려는 듯, 한편으론 사뿐거리고 한편으론 힘차다.

a 도올 김용옥 선생이 꽹과리를 받아들고 힘차게 울리면서 주민들과 어울려 커다란 불길이 솟는 달집태우기 행사장 주위를 연신 돌고 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꽹과리를 받아들고 힘차게 울리면서 주민들과 어울려 커다란 불길이 솟는 달집태우기 행사장 주위를 연신 돌고 있다 ⓒ 서정일

커다랗게 쌓아 올린 짚단에 불이 붙여지고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함성이 일시에 터진다. 농악은 더더욱 커다란 울림으로 땅을 울리고 대나무가 타면서 지르는 굉음은 폭죽을 연상케 한다. 이때 돌연 도올 김용옥 선생이 꽹과리를 받아들고 힘차게 울리면서 농악의 선두에 선다. 그의 뜻밖의 방문에 놀람반 반가움반 함성이 울리고 행사장은 걷잡을 수 없는 열기로 빠져든다. 개인적인 일로 낙안읍성을 방문했지만 함께 하고 싶은 욕망으로 바쁜 일정을 뒤로 미뤘다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서민적인 내음은 향기로 느껴진다.

a 커다란 불기둥을 만들면서 달집태우기는 시작되었다. 모인 모든 사람들은 보름달과 불기둥 앞에서 저마다 가슴에 품은 소원들을 빌었다

커다란 불기둥을 만들면서 달집태우기는 시작되었다. 모인 모든 사람들은 보름달과 불기둥 앞에서 저마다 가슴에 품은 소원들을 빌었다 ⓒ 서정일

갑작스런 도올 선생의 꽹과리 소리에 대보름 행사는 더욱 뜨거워졌고 달집태우기 행사는 참가한 사람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불기둥을 도는 이들은 너나 없이 밝은 표정으로 함께 어울려 덩실 덩실 춤을 췄고 농악은 제사람을 만난 듯 신명을 더했다. 바쁜 일정을 뒤로 미루고 기꺼이 어울림 속으로 들어온 도올 선생의 소탈함을 행사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낙안읍성에서는 방문했던 분들의 소중한 여행기를 기다립니다.
낙안읍성 공식 홈페이지: www.nagan.or.kr

덧붙이는 글 낙안읍성에서는 방문했던 분들의 소중한 여행기를 기다립니다.
낙안읍성 공식 홈페이지: www.naga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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