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이 이미 삼남(三南 : 충청, 경상, 전라)으로 가는 길을 끊고 있다고 하던데.”
“이거 꼼짝도 않고 이대로 다 죽자는 것인가.”
전날 박난영의 죽음으로 잠시 술렁이던 병사들은 다음날 다시 예전처럼 분위기가 가라앉고 말았다. 박난영이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무장도 아니었거니와 들려오는 소식들은 모두 암울한 것들뿐이었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몇몇 이들이 이상한 일을 한다 하더라도 관심 있게 지켜보는 이는 없었다.
서흔남은 몇몇 동료와 함께 전날 왕의 행차가 지나간 이후로 무기고 뒤의 가옥을 꼼꼼히 뒤져보는 일을 부여받았다. 이서가 몰래 내린 지시였지만 그들이 딱히 무엇을 찾는 다는 목표도 없었거니와 무엇을 찾아내야 한다는 말조차 없었기에 처음 얼마동안을 빼고서는 거의 노닥거리는 일만 하다가 급기야는 아무 곳이나 누워 낮잠을 자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서흔남의 귓전까지 몰래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그의 잠을 깨웠다.
“이보시오.”
느긋한 말투였지만 낮잠을 자던 서흔남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찾아온 사람은 두청이었다.
“이거 놀라지 않았소!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오?”
두청은 조용히 합장으로 인사를 한 후에야 용건을 얘기했다.
“실은 총융사 나으리의 명으로 무엇인가를 찾아 이쪽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별거 아닌 넋두리라도 듣는 듯한 태도를 취했던 서흔남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몰래 받든 일이거늘 누구에게서 들었는가?”
“쉿!”
두청은 아직도 어디에선가 자고 있을 사람들을 의식하며 서흔남을 으슥한 곳으로 잡아 이끌었다.
“서선달(서흔남이 선달은 아니나 높여 부름)께서는 임회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서흔남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이장군은 아실테지요?”
그 말에 서흔남의 눈이 당혹감과 의혹으로 가득 차 버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오?”
“오래전에 이곳에서 알 수 없는 글귀가 적힌 궤짝을 찾아낸 일을 기억하시옵니까?”
“그게 뭐 어쨌단 말이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는데.”
서흔남은 두청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실은 그때 그 궤짝에서 묘한 물건을 찾아내었소.”
두청은 품속을 뒤지더니 작은 금붙이를 꺼내어 주었다. 이를 본 서흔남은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특한 중놈 같으니라고! 점잖고 고결한 채 딴죽만 부리더니 언제 이런 걸 찾아내었누! 그나저나 그때는 분명 이런 것이 없었는데….’
게다가 금붙이를 자신에게 무작정 줄 리가 없다는 것 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흔남은 왠지 마음 한구석이 께름칙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것이 언제 그 안에 있었다는 말이오?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이오?”
두청은 웃으며 서흔남의 귀에 바짝 붙어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언제 이런 것이 있었다고 했소? 묘한 것이 있었다고 했지…. 그런데 정녕 이장군을 모르시오?”
“모, 모르외다! 조선 천지에 이가가 어디 한 둘이오?”
“좋소이다. 광주 서두령! 내 그 말을 곧이 들으리다!”
그 말에 서흔남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품속에서 비수를 뽑아 들어 두청의 목에 겨누었다.
“네 놈은 누구냐!”
두청은 목에 겨누어진 비수를 보고서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웃을 뿐이었다. 오히려 비수를 든 서흔남의 손이 약하게나마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