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는 이주노동자들의 사랑방

몇몇 이주노동자들이 떠난 쉼터의 아침

등록 2005.03.10 12:09수정 2005.03.10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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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에 도착하자, 쉼터에서 잠을 잔 건장한 총각 여남은 명이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방을 보니 이른 아침에 출국한 헤리, 아구스, 니나의 짐들이 차지했던 방구석이 휑합니다.

잠을 잔 사람들은 브라모노, 에꼬, 아구스 수기안또, 까숨, 수트리스, 수까르티, 마시얀또, 후마입니다. 오늘 아침 귀국하는 친구들을 위해 노래방에 갔던 친구들 대부분이 쉼터에서 잠을 잔 듯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잠은 자기엔 담요가 부족했을 텐데 ‘춥지는 않았을까?’란 생각을 하며 보일러 온도를 보는 순간, 이게 웬일입니까? 설정온도가 45도를 가리키고 있었고, 현재 온도는27도까지 올라가 있었습니다. 보일러를 어지간히 돌린 모양입니다. 더운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라 추위를 많이 타서 그러려니 하지만 한편으론 기름값이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근래 우리쉼터를 이용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귀국을 앞두고 있습니다. 5년 혹은 그 이상씩 이주노동자로 살다가 돌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인지 다들 얼굴이 밝고 활달할 뿐만 아니라 매사에 적극적입니다.

얼마 전에도 출근하자마자 눈에 띄는 것이 있었습니다. 현관 앞에 놓인 봉투 끝까지 가득 찬 대형쓰레기봉투였습니다. 그동안 쓰레기봉투를 산다 산다 하면서 시간을 내지 못해 큰 비닐봉지에 그냥 쓰레기를 모아 놓고 있었습니다.

그날 제가 본 대형쓰레기봉투는 쉼터를 이용하는 친구들이 정리를 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쉼터 전체가 깨끗이 정리 돼 있는 모양새가 쉼터에서 잠을 잔 이들이 열심히 청소를 한 모양입니다.

쉼터라고 하지만 잠을 잘 수 있는 방과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쌀을 제공하는 것 외에 달리 해 주는 것도 없고, 간섭도 하지 않습니다.

쉼터에 굳이 이용수칙이 있다면, 담배는 실외에서 피우도록 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심지어 쉼터 열쇠도 이용하는 사람들이 돌려가면서 보관할 정도로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인지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은 쉼터지만, 사랑방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곳이 됐습니다.

아침부터 깔끔 떤 총각들이 어떻게 사나 확인해 볼 요량으로 냉장고를 열어보니, 지난 삼일절에 갖다 논 시루떡이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습니다. 떡이 입맛에 맞지 않나 봅니다. 반면, 얼마 전 사다 놓았던 계란은 거의 다 없어진 걸로 봐서 삶아 먹기도 하고, 라면에 넣어 먹기도 했나 봅니다.

총각들이 스스로 밥을 해 먹는 것이 귀찮아서인지 어떤지 몰라도, 요새 주식은 라면인 듯싶었습니다. 쓰레기봉투에 라면봉지가 수북했거든요.

그 외에 배추와 당근과 같은 약간의 야채가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고, 방울토마토와 귤, 오렌지가 뒹굴고 있던 김치통 위엔 붕어빵이 두 개 놓여 있었습니다. 군것질을 하다 남겨 놓았나 봅니다. 냉장고 안에 있는 붕어빵을 집어 먹어보니 이미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져 있었습니다. 어찌됐든 깔끔 떤 친구들 덕택에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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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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