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너나없이 했다던 '길쌈'

낙안읍성에서 길쌈하는 이옥례 할머니

등록 2005.03.11 22:05수정 2005.03.12 09:17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모시, 무명, 명주 등의 직물을 짜는 모든 과정을 '길쌈'이라 한다. "옛날엔 너나없이 하던 일인데"라고 표현하는 낙안읍성 이옥례(70)할머니의 말처럼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의 일상사였던 길쌈이 지금은 민속마을에서나 볼 수 있다.


낙안읍성에서 5년 동안 길쌈 시연을 하고 있는 이옥례 할머니, 삼을 입으로 잘게 찢어 한 가닥 한 가닥 곱게 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낙안읍성에서 5년 동안 길쌈 시연을 하고 있는 이옥례 할머니, 삼을 입으로 잘게 찢어 한 가닥 한 가닥 곱게 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다서정일
다섯 평 정도의 자그마한 방에서 전지다리 마주 쌍쌍 삼가래를 걸어놓고 무릎을 걷어부치고 삼을 꼬고 있는 이옥례 할머니는 낙안민속마을로 5년 전에 우연찮게 들어왔다. 마을 행사 때 길쌈시연을 위해 방문했다가 보여줄 거리를 찾고 있던 관리사무소의 눈에 띈 것. 그래서 그대로 눌러 앉은 게 할머니의 또 다른 터전이 되었다.

왜 옛날 부모님들은 여성의 교육에 관해 그렇게 관대하지 않았을까? '여자를 가르쳐서 뭐해'라고 말하면서 입학통지서가 나왔는데도 학교에 보내지 않은 부모님을 원망하는 이 할머니는 늙고나니 그게 그렇게 서글프다면서 길쌈 틈틈이 글자 하나라도 읽어보려고 하지만 말처럼 잘 되지 않는다고 푸념을 한다. 물어볼 게 있으면 말로 해달라면서 자신은 '까막눈'이라고 애써 낮춘다.

사진 가까이 받침대에 대나무가 꼽혀져 있는 것을 '전지다리'라고 한다. 3대째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니 200여년쯤 된 유서 깊은 할머니만의 문화재인 셈이다
사진 가까이 받침대에 대나무가 꼽혀져 있는 것을 '전지다리'라고 한다. 3대째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니 200여년쯤 된 유서 깊은 할머니만의 문화재인 셈이다서정일
"집에 안갈 거여?" 길쌈하는 얘기를 들려달라고 했더니 설명하려면 한도 끝도 없다면서 대뜸 소리친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보여준다. 뭉툭한 손마디, 짤막하고 두툼한 손톱이 길쌈하는 게 얼마나 힘들고 또 많은 공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옛날에는 삼을 찔 때 부뚜막같이 생긴 곳에 돌을 쌓아놓고 하루 종일 장작불을 지펴 달구었다고 한다. 돌이 빨갛게 달아올라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보일 때 꺼내서 물을 끼얹어 그 열기로 삼을 쪘다고 하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물지게로 물을 져나르는 모습하며 돌에서 올라오는 하얀 김이 볼 만했다고 한다.

다섯 평 정도의 작은방은 베틀등 길쌈하는 도구와 살림살이로 꽉 차있다. 좁은 장소임에도 이리 밀고 저리 밀고 자리를 만들어 작업을 하는 이옥례 할머니가 애처러워 보인다
다섯 평 정도의 작은방은 베틀등 길쌈하는 도구와 살림살이로 꽉 차있다. 좁은 장소임에도 이리 밀고 저리 밀고 자리를 만들어 작업을 하는 이옥례 할머니가 애처러워 보인다서정일
"쪄지면 삼의 껍질을 벗긴다. 벗기면 널찍하다. 그러면 묶어서 볕에 말린다. 대가리 묶은 곳이 완전히 바싹 말려질 때까지 그리고 째서…."


안 해준다던 길쌈 얘기를 보따리 풀 듯 하나하나 천천히 풀어내 보인다. "집에 안 갈 거냐"는 할머니의 우스개 소리가 사실로 증명된 셈. 오랜 시간 길쌈 얘기는 계속되었다.

"코쟁이들도 오는데 신기한지 자기들끼리 뭐라 뭐라 한다니까" 민속마을이라 그런지 세계 각국 사람들이 다 찾아온다면서 '꼬부랑 글'도 알아야겠다고 웃는 이옥례 할머니. 하지만 웃음 속엔 힘겨운 모습들이 감춰져 있다. 비좁고 힘든 방 한 칸에서 모두가 힘들어 마다하는 길쌈을 하는 칠십 노인의 모습에 약간의 그늘이 있다.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든 것은 그것을 '가치 있다'고 평가하지 않을 때다. 좀더 좋은 장소에서 가치를 인정받아 마음 편하게 길쌈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기를 빌어본다.

덧붙이는 글 | 전통을 사랑하는 곳 낙안읍성
http://www.nagan.or.kr

덧붙이는 글 전통을 사랑하는 곳 낙안읍성
http://www.nagan.or.kr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치매 걸린 아버지 댁에 온 남자... 그가 밝힌 반전 정체 치매 걸린 아버지 댁에 온 남자... 그가 밝힌 반전 정체
  2. 2 한식에 빠진 미국 청년, 이걸 다 만들어봤다고? 한식에 빠진 미국 청년, 이걸 다 만들어봤다고?
  3. 3 경찰까지 출동한 대학가... '퇴진 국민투표' 제지에 밤샘농성 경찰까지 출동한 대학가... '퇴진 국민투표' 제지에 밤샘농성
  4. 4 민교협 "하나마나 기자회견... 윤 대통령, 정권 이양 준비하라" 민교협 "하나마나 기자회견... 윤 대통령, 정권 이양 준비하라"
  5. 5 김 여사 감싼 윤 대통령, 새벽 휴대폰 대리 답장 일화 공개 김 여사 감싼 윤 대통령, 새벽 휴대폰 대리 답장 일화 공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