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나뭇잎 없이 매달린 매실꽃이 눈물 같다고 합니다.송성영
햇살 좋은 봄기운에 빨래를 널던 아내가 잠시 손을 놓고 말했습니다.
"꽃이 눈물 같네…."
"뭐가?
"저기, 매실 나무에 핀 꽃."
"……."
"잎도 없이 나뭇가지에 달랑 매달려 있어 그런가. 눈물 같어."
얼마 전 처형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담낭암 말기로 고생하던 처형이 돌아갔습니다. 쉰 두 해를 살다가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처형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처형이 떠난 곳이 바로 그곳이라 믿고 있습니다.
처형이 믿었던 종교에서는 그곳을 천국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곳이 천국이든 어디든 간에 본래 왔던 곳이라 믿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왔고 또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났으니 본래 왔던 그곳이 그곳이라 할 수밖에요.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언젠가 그렇게 떠날 것이라고 봅니다.
지난 1년 동안 가깝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넷이나 떠났습니다. 대부분 말기 암 선고를 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40대 초반에서 5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젊다면 젊은 나이들이었습니다. 세상살이에 모질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진 세상을 아프게 껴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뭔가를 빼앗고자 하기보다는 뭔가를 주고자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처형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를 받으면 열을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 걱정에 밤잠을 설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처형의 임종 소식을 듣고도 아내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차라리 잘 됐는지도 모르지,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는데 더 이상 힘겹게 숨쉴 필요가 없어졌으니 얼마나 홀가분하겠어…."
아내는 처형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날까지 처형의 머리맡을 지켰습니다. 처형이 사경을 헤매던 일주일 내내 곁에 있었기에 그토록 담담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내는 이미 처형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그 아픔을 조금씩 녹여왔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암 말기 선고를 받았던 1년 전부터 아픔을 덜어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죽음 앞에 서면 누구나 생각을 깊게 합니다. 죽음 저편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아내는 빨래 줄에 축 늘어진 옷가지들을 집게로 고정시켜 놓으며 생사에 도가 튼 사람처럼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산다는 게 얼마나 잘 죽을 수 있는가, 그걸 준비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죽을 때 편하게 죽는 것도 복이지."
아내 말대로 '잘 죽는 것'이야말로 복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태어나면 죽기 마련이고 또한 죽을 때 편하게 죽기를 바랍니다. 특히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 함께 하다보면 '잘 사는 것'보다는 '잘 죽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단지 상상이라 할지라도 죽음 앞에 서면 두려움이 앞을 가립니다. 누구는 그 죽음이 두려워 부질없는 세상 실컷 즐기고 살자는 식으로 좀 더 욕망에 휘어 잡혀 살아가기도 합니다. 또 누구는 손아귀에 쥐고 있던 부질없는 욕심 덩어리들을 놓기도 합니다.
"염할 때 언니 손목을 만져 보니까, 체온이 남아 있는 거 같더라."
"안 이상혀?"
"언니 시신 옆에서 잠자라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더라."
언니의 죽음을 홀가분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아내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두려움이 없어 보였습니다. 아내는 처형이 그러했듯이 쥐고 있던 욕심덩어리들을 하나 둘씩 풀어놓고 있었습니다. 고정 돈벌이에서 손을 떼고 싶어하는 남편인 나에게 언제든지 손 뗄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아이들 교육이며 생활비 걱정을 했던 아내였는데 처형의 죽음과 함께 다시 예전처럼 걱정 없는 얼굴로 되돌아왔습니다. 한달 생활비조차 간당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가롭게 풀꽃 그림을 그렸던 예전의 그 '철없는 아내'로 다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