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녹색 피라미드 (72회)

등록 2005.04.19 10:52수정 2005.04.1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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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박사님이 그 유물을 숨겨둔 피라미드의 위치를 표시해 놓았을까요?"

김 경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물론입니다. 박사님이 칼에 찔리고 사망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있었어요. 그 시간 동안 사력을 다해 유물이 숨겨진 곳을 메시지로 남겼을 겁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겠어요?"

"그분은 자신의 목숨보다 유물을 더 소중히 여긴 분입니다. 확실치 않은 목숨을 붙잡기보다는 숨겨둔 유물을 알리는 걸 택했을 겁니다."

"살인자를 그걸 알면서도 왜 박사님을 바로 살해하지 않았을까요?"

"일부러 죽기 전까지 시간적 여유를 주었을 겁니다. 박사님이 그 메시지를 남길 것을 알고 그들도 그걸 찾기 위해 죽기 전까지 시간을 준 게 분명합니다. 박사님도 그걸 모르지 않았겠죠. 그래서 아주 교묘하게 그 메시지를 남겼을 겁니다."

"하지만 메시지를 남겼을 그 집은 불에 타버렸잖아요."


"아마도 그들이 방화를 했을 겁니다."

"그 메시지가 남겨진 곳인데 왜 불을 질렀다는 거죠?"


"그들도 그 메시지를 찾기 위해 박사님 집을 샅샅이 뒤졌을 겁니다. 하지만 끝내 그 메시지를 찾지 못해 불을 질러버렸을 겁니다. 자신들은 굳이 그 유물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죠. 원래 그들의 목적은 그게 세상에 알려지는 걸 막는 것이니 불을 질러 아예 그 메시지 자체를 없애버린 것이죠."

"그럼 그 메시지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채유정의 그 말과 함께 김 경장이 자신이 들고 있던 디지털카메라를 들어 보였다.

"이걸 철저하게 분석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는 거의 눕다시피 벽에 기대어 카메라의 액정화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현장을 담은 사진은 족히 100장이 넘었다. 버튼을 눌러 그 사진들을 한 번씩만 보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사진에는 살해 현장의 다양한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박사가 죽은 채 엎드려 있는 거실은 물론이고 각 방과 욕실까지 사물이 보이는 곳은 모두 카메라에 담아놓았다. 사진은 각 장소에 따라 순서 대로 담겨 있었다.

먼저 박사가 숨져 있는 거실. 안 박사는 대나무 돗자리가 깔린 바닥 위에 두 손을 위로 향한 채 엎드려 있었다. 가슴 부근에는 피가 홍건이 고여 있었는데, 그 핏자국은 집 안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곧 박사가 범인의 칼에 찔리고도 집안을 돌아다녔다는 말이 된다. 그는 구급차를 부르는 대신 유물이 있는 곳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을 것이다.

카메라는 그 핏자국을 중심으로 현장 주위를 담아냈다. 박사는 칼에 찔린 채 서재와 거실을 오간 것 같았다. 핏자국이 서재 쪽에 많이 묻어 있는 게 보였다. 예상 대로 유물의 단서는 서재에서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도 카메라에는 서재의 모습을 비교적 소상히 담고 있었다.

서재에 있는 집기는 창가에 놓인 한 개의 책상과 두 벽을 채우고 있는 책장 뿐이었다. 책상에는 필기도구와 한쪽 옆에 쌓아놓은 책들 사이로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그 바둑판 옆에 나란히 바둑 해설서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그 책에 놓인 그림을 따라 바둑을 놓다가 갑자기 범인의 침입을 받은 듯 했다. 바둑알 몇 개가 바둑판 밑에 흩어져 있는 것이다.

책상 밑에는 서랍 두 개가 뽑혀 바닥에 놓여 있었다. 다른 서랍 두 개도 반쯤 열려 있었다. 카메라는 그 서랍의 내용물까지 모두 화면에 담아놓았다. 책이 빽빽이 꽂혀 있는 책장에도 피묻은 손자국이 보였다. 책장을 더듬기만 한 것인지, 아니면 책장에 꽂힌 책을 직접 꺼내 들었는지는 사진 상으로 확인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저 많은 책 안에 어떤 단서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박사의 집이 모두 불에 타 없어지면서 그걸 확인하기 어렵게 되었다. 어쩌면 유물이 있는 피라미드의 위치를 영원히 알 수 없게 될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김 경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끈질기게 매달려 그 사진들을 자세히 살폈다. 한참 동안 좁은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느라 눈이 붉게 충혈 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단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화면이 작은데다 사진도 많아 그걸 분석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한 시간이 넘게 카메라에 매달려 있느라 머리가 지끈지끈하게 아파 오고, 어깨까지 쑤셔왔다. 더구나 좁은 지하실의 공기마저 눅눅하여 뼛속까지 습한 기운이 퍼진 듯 했다. 맞은 편에 앉아 있는 채유정이 코를 찡긋해 보였다.

"좀 쉬면서 하지 그래요?"

김 경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문 입구에 나와 담배를 피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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