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라일락꽃 그늘 아래 -46회 (8부 : 푸른 낙엽)

첫사랑은 아픈 거예요

등록 2005.04.20 16:20수정 2005.04.2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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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초
인동초이정남 화백 제공
8. 푸른 낙엽

대학 4학년. 봄이 왔다. 모두들 새봄이 왔다고 좋아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봄이 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혹독한 겨울 추위와 된바람에 몸과 마음을 맡긴 채 보리처럼 겨울나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겨울 같은 봄이 계속되고 있었고, 또한 겨울 같은 여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양단 간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어떤 어려움을 무릅쓰고라도 초희와의 사랑을 꽃피워낼 것인가. 아니면 이쯤에서 그녀를 떠나보내야 하는가를... 어떤 것이 참으로 그녀를 위하는 길인가. 그것만 생각하기로 하였다.

솔직히 그녀의 집과 우리 집과는 빈부차이가 제법 컸다. 그녀의 집이 의사집안의 상류층 가정이라면 우리 집은 촌구석에 박혀있는 가난한 농촌 가정에 불과하였다. 종교 또한 너무나 달라 그녀의 집이 내로라하는 천주교 집안이라면 우리 집은 공맹사상으로 투철하게 무장된 유교 가정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사랑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쳤다. 양가의 축복을 받으며 거행되는 결혼식은 솔직히 기대할 수 없었다. 양가 집안의 극심한 반대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중차대한 것이 남아 있었다.

나의 진로, 곧 장래희망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대학 4년을 다니는 동안 그 내용은 상당 부분 달라졌다. 내가 처음에 생각한 목회자상은 그저 열심히 묵상하고, 설교 잘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성도들에게 두루두루 은혜를 끼치는 그야말로 제사장 직분에 충실한 그런 목사였다.

그러나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목회자상은 그런 차원이 아닌 문익환 목사님처럼 역사와 시대의 부름에 앞장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내는 선지자적 사명에 충실한 목사였다.


그리하여 이 땅에도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복된 가나안이 되게 하고 싶었다. 문목사와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일제강점기 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곳곳에 시기와 질투, 공갈과 협박이 도사리고 있어, 어떤 의미에서는 목숨까지도 담보해야하는 가시밭길이었다.

본인도 물론 숱한 고초를 겪겠지만, 그러나 본인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소명이라고 생각하며 감내한다고 하지만, 그 가족들의 고생이란 실로 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초희를 공주처럼, 여왕처럼 호의호식은 못 시켜줄망정 그런 형극의 길까지 감내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내가 나의 진로를 바꾸어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한 그녀의 고생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고난과 역경은 나 하나로 족하지, 차마 그녀에게조차 그런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는 눈물을 머금고라도 그녀를 떠나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참으로 장고(長考) 끝에 그녀를 떠나보내기로 결론을 낸 이상 하루라도 빨리 시행에 옮겨야 했다. 나는 아버지의 병을 핑계로 그녀와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러나 보니 예전 같으면 거의 매일같이 만나던 우리의 횟수가 삼일에 한번, 일주일에 한번, 다시 열흘에 한번, 심지어 보름에 한번으로 점점 횟수가 적어지는 것이었다.

일부러 작정하고 내가 그녀와의 만남을 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속으로 울었다. 때로는 그녀가 보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를 하셨으면 말씀을 하셔야지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차마 나라는 것을 밝힐 수가 없었다.

"참 이상한 전화도 다 보겠네."

그러면서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또 한번인가는 전화를 했더니

"여보세요? 여보세요?"

역시 그녀의 목소리였다. 내가 말을 하고 있지 않자

"혹시 철민씨? 철민씨 맞죠?"

이러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공중전화 수화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그녀가 보고 싶어도 전화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그녀의 하숙집 근처에 숨어서 그녀를 지켜보는 일이었다.

그녀는 늘 늦게 들어왔다. 가끔은 영희와 함께 귀가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혼자였다. 그녀가 나타나면 나도 모르게 초희! 하며 달려갈 것 같은 내 몸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늘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걷는 것이었다.

골목길, 또는 나무 뒤에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나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느새 나의 얼굴은 때마침 피어오르는 진달래와 철쭉꽃처럼 빨갛게, 새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4월인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은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요? 말해줘요 고칠게요. 답답해 죽겠어요. 정말 무슨 일이에요? 말 좀 해줘요. 이젠 나랑 말하기도 싫은 거예요?"

나는 계속되는 그녀의 푸념을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내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도 지쳤는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제 말을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모질게 마음을 먹고 입을 뗐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아무래도 우리는 인연이 아닌가 봐."

그러자 그녀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만 만나자니요! 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집안에서 또 나랑은 절대 안된대요? 아니면 우리 엄마나 아빠가 또 뭐라고 했어요? 도대체 뭐예요? 왜 그러는데요?"

그녀답지 않게 적잖이 흥분까지 하면서 나를 다그쳤다. 그 바람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어떤 시련이나 고난, 반대, 장애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랑을 쟁취하자고 한 사람이 누군데,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기만 하면 시간이 다 해결할 거라며 철석같이 믿어달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이제 와서 이러면 나는, 나는 어떡하라고, 도대체 왜 그러는데요? 말이나 좀 해봐요? 왜 마음이 변했는지‥‥‥ 흑흑흑."

어느새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울먹이는 소리가 잠잠해질 때까지 그렇게 그녀를 두 팔과 뜨거운 가슴으로 품고 있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그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음이 변한 게 아냐. 생각이 바뀐 거지. 내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야. 아니, 전보다 더 뜨거워. 나도 너를 보내기 싫어. 나도 너와 헤어지기 싫다고. 솔직히 나도 너를 갖고 싶어. 정말이야 진심이라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네가 더 잘 알잖아. 난 너 없인 살 수 없을지도 몰라."

"그런 사람이 왜 헤어지제?"

"하지만 우린 인연이 아닌 걸 어떻게. 우리의 복이 이것뿐인 걸. 우리 그냥 서로를 만나서 서로에 대해 알고 그리고 사랑했었다는 것으로 만족하자. 난 솔직히 너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 나 때문에 고통당하는 건 차마 지켜볼 수가 없다고. 미안해 더 이상 묻지 마. 할 말이 없어. 그냥 우리는 인연이 아닌가보다 해."

"안돼. 나는 그럴 수 없어. 나는 철민씨 없는 삶은 생각도 안 해봤어. 그럴 수 없어. 그럴 수 없다고. 차라리 그럴 바엔 죽든지 수녀가 되겠어. 내가 철민씨를 떠나 어떻게 살아. 살 수 없다고. 철민씨도 나 없이 못 산다며. 그럼 뭐가 문제야.

지금까지 잘 참고 버텨왔잖아. 앞으로도 참고 이겨나가면 되지. 언젠가는 부모님께서도 우리 사이를 인정해 주실 거야. 그럴 거라고. 그러니까 철민씨, 우리 희망을 버리지 말고 조금만 참고, 조금만 버텨보자 응?"

그녀는 그렇게 나에게 애원을 하다시피 했다. 물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 독자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47회에서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 이번 호부터 이정남 선생님의 그림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좋은 그림을 삽화로 제공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이번 호부터 이정남 선생님의 그림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좋은 그림을 삽화로 제공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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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포럼 <교육을바꾸는새힘>,<학교안전정책포럼> 대표(제8대 서울시 교육의원/전 서울학교안전공제회 이사장) "교육 때문에 고통스러운 대한민국을, 교육 덕분에 행복한 대한민국으로 만들어가요!" * 기사 제보 : riulkh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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