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에 너무 버거웠던 아이들

아이들에게 천천한 걸음으로 다가가고 싶다

등록 2005.05.14 07:06수정 2005.05.14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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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여기 앉고, 넌 저기 앉아.”

말도 없이 학교를 나가버린 두 아이에게 종이 한 장씩을 건네며 던진 말이다. 텅 빈 열람실에 싸늘하게 울려퍼진 내 목소리에 놀란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평소 제 담임선생을 남자친구 대하듯 하던 녀석들이었으니 갑자기 돌변한 나의 태도가 낯설기도 했겠지만 그렇다고 겁을 먹은 눈치는 아니었다.

“내년에 꼭 담임해주세요. 안 그러면 저 학교 자퇴할래요.”

지난해 겨울방학을 며칠 앞두고 그런 말을 내비쳤을 때는 “내가 담임하면 너희들 마음 놓고 말썽 피우려고 그러지?” 하고 농담조로 넘기고 말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정말 담임을 맡아볼까?’ 하는 생각을 품어보기도 했었다.

어떤 동기에서든 나를 선택해준 아이들이 고마웠던 것이다. 수업시간이면 고개를 푹 숙이고 있거나, 휴대폰을 가지고 놀거나, 줄기차게 잡담을 하기 일쑤인 녀석들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담임을 맡고 싶다고 맡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우연히도 단짝이었던 세 아이 모두 우리 반이 되었다. 그 중 한 아이는 신바람이 나는지 뜬금없이 반장을 하겠다고 나섰고, 두 아이도 덩달아 학교생활에 열의를 보이면서 삼월 한 달은 순조롭게 지나갔다.

사건이 터진 것은 달력이 삼월에서 사월로 넘어가던 바로 그날이었다. 자리 배정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처음에는 번호순으로 자리에 앉다가 다음 달부터 제비뽑기로 자리를 정하기로 했는데 막상 자리를 바꿀 날이 다가 오자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던 것이다. 한 아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저 자리 바꾸면 학교 그만 둘래요.”
“그러든지 말든지. 그만 두면 네 손해지, 내 손해냐?”


겉으로는 그렇게 시큰둥하게 대꾸를 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학교에는 논리적으로 따져서 잘못을 인정하게 하고 따끔하게 혼을 내주는 방식으로는 아무런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아이들이 있다. 이런 경우 대개는 학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사 자신의 화를 풀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언제나 비참하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날 자리배정에 불만을 품고 말도 없이 학교를 나가버린 두 아이에게 나는 까마득한 절망을 느끼면서도, 그럴 아이들이 아닌데…, 하고 한 가닥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한 달 동안 보여준 변화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결국 그들 안에서 나온 것이 확실하다면, 뭔가 길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다음 날 학교에 온 아이들에게 종이를 내주면서 반성문이나 경위서가 아닌 편지를 써보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먼저 죄송하다는 말부터 드리고 싶어요. (…) 분명 먼저 제비뽑기로 한 다음 앞자리가 됐든 뒷자리가 됐든 양해를 구하고 바꿔준다는 말로 전 선생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부터 학교에서 갑자기 나가거나 전화 한 통 없이 결석하는 일은 없도록 노력할게요. 저희 마음은 정말 그게 아니에요. 저희 마음속에 들어와 보지 않는 이상 잘 모르시겠지만, 이번에는 정말 저희가 잘못한 것 잘 알아요. 정말 죄송해요.’

‘아, 그러면 그렇지. 그런 오해가 있었구나!’

자초지종은 이랬다. 먼저 제비를 뽑기를 한 다음 눈이 나쁘거나 키가 크거나 해서 자리를 바꿀 필요가 있는 아이들을 위해 다시 자리를 조정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데, 앞자리에 앉게 되거든 그때 아이들에게 양해를 얻고 뒷자리로 바꿔보라고 했던 것이다.

그 말을 오해한 것이 분명하지만, 혹시라도 자리 문제로 그동안 누려온 평화가 깨지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내 쪽에서 애매모호하게 말을 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날 나는 그것까지 두 아이에게 사과를 하고 그들과 뜨겁게 화해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나와 철썩 같이 한 약속을 저버리고 말도 없이 학교를 나가버린 것이 벌써 세 번째였고, 게다가 잘못을 뉘우치는 빛이 없어 보이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한 순간 머리 속이 캄캄해졌다. 이 아이들은 과연 어떤 아이들인가. 누구 말대로 나는 혹시 아이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진실이 통하지 않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써달라는 부탁을 한 뒤에 잠시 밖으로 나왔다. 슬프고 답답한 마음에 누군가와 상의해보고 싶기도 했지만 이런 경우 열이면 아홉은 아이들의 진심을 의심하는 쪽으로 얘기가 나올 것이 뻔했다. 학교 운동장에는 봄인데도 낙엽이 한 장 뒹굴고 있었다. 푸른 낙엽이었다. 나는 그것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다가 문득 오래 전에 썼던 시가 한 편 떠올랐다.

허리를 숙이고 낙엽을 줍는다/허리를 숙일 때의 천천한 동작을 즐긴다/땅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는 것도 좋다/작은 것들이 커 보인다/(…)/ 땅에 사는 작은 생명들/허리를 숙이고 낙엽을 줍다보면/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같다/자연히 낙엽 줍는 손길이 늦어진다/성급히 쓸다보면 쓰레기가 되는 것들이/천천히 줍다보면 낙엽이 된다.
-시, ‘낙엽 줍기’


나는 푸른 낙엽 한 장을 손에 든 채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들은 아직도 열심히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무엇을 쓰고 있을까? 그것을 읽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한 가지 분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아직 철없는 아이들이지만 거짓말을 하지는 않으리라는 것. 왜냐하면 내가 솔직하게 써달라고 부탁했으니까. 우린 그렇게 서로 약속을 지키며 믿음과 사랑만으로 한 달을 보낸 적이 있으니까. 나는 천천한 걸음걸이로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나의 성급함으로 자칫 푸른 낙엽이 될 뻔한 아이에게.

오늘은 우리 반 반장 하림이 아니, 명지의 생일이다. 하림이는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집으로 전화를 하면 “하림도시락입니다”하고 직원이 전화를 받는다. 하림이는 반장으로서 책임감을 다하느라 어쩔 수 없이 한두 번 과거의 습관으로 돌아갔다가도 금방 되돌아오곤 한다. 자리 때문에 갈등을 빚기도 했던 두 아이도 그들 내면에 지니고 있던 것들이 한껏 빛을 발하면서 불과 몇 주 전에 있었던 일들이 까마득한 과거처럼 느껴질 만큼 성숙해졌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들어 올지는. 그래도 나는 'No problem!'이다. 이미 우리는 건너야할 강을 몇 차례 건너온 경험이 있으니까. 함께 강을 건너면서 서로 확인한 것이 있으니까.

하림 도시락 딸에게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하림이용, 아니 명지?
그러고 보니 곧 생일이네요.
깜빡하고 있었어요.

집에서 부르는 이름과
학교에서 부르는 이름이 달라
나도 헛갈릴 때가 많은
우리 하림이, 아니 명지!

일주일에 다섯 시간
영어선생으로 만난 작년 한 해 동안
너의 숙여진 어깨를 일으켜 세우느라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친 적도 있었지.

그러다보니 정이 들었던지
내년에 담임 맡아주지 않으면
학교 그만 두겠다고 협박하던 네가
콧등이 시큰하도록 고맙기도 하고
정말 담임을 맡을까봐 겁도 나고 그랬었지.

지금은 의젓한 반장이 되어
내가 쩔쩔매는 일도 너는 척척
시원시원 일 잘 하다가
가끔은 과거가 못내 그리운지
돌아갔다 오기도 하고

그래서 아직 철이 덜 든 것 같다고
그래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그렇게 편지에 적어 보낸 너를, 너의 마음을
너의 네 자신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돋보기를 대고 보듯 잘 읽고 있단다.

이제 너와 나는
건너야할 강을 거의 다 건너온 것 같지만
그래도 모르지, 풍덩 물에 빠지는 날이 또 올지.
오면 어때? 상대가 바로 넌데
너만큼 꾸밈없이 진실한 아이도 드문데
No problem이지!

2005년 5월 14일
사랑하는 명지, 아니 하림이의 생일을 축하하며, 담임선생님이.

덧붙이는 글 | 월간지 <사과나무>에 기고한 글을 깁고 보탰습니다.

덧붙이는 글 월간지 <사과나무>에 기고한 글을 깁고 보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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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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