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83회

등록 2005.05.16 08:02수정 2005.05.16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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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보는 역시 무서운 곳이었다. 중원무림에서 가장 강한 문파라는 위명은 거짓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의 무서움은 정(正)이니 사(邪)이니 하는 고식적인 개념에서 벗어난 문파라는 점이었다. 세인들이 어떠한 평가를 하던 그들은 위명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방법도 동원했다.

정정당당이란 말은, 그리고 정파라는 단어는 철혈보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철칙은 오직 하나였다. 적이나 친구냐? 친구라면 도움을 주지만 적이라면 죽이는 것이었다. 아주 명백하고 간단한 논리였다. 그래서 그들은 한 개의 목숨은 열개로 갚아주고, 한번의 도움은 열 번으로 갚는다는 것이었다.


하루 밤 사이에 열일곱 번의 암습은 한순간도 그들의 눈을 붙이지 못하게 했으며 긴장감으로 인해 더욱 피곤하게 만들었다. 마차 두 대로 움직인 그들은 한시진이면 당도할 거리를 밤새워 이동한 것에 불과했다. 분명 정면으로 승부를 걸어올 만도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철혈보는 자신들을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정작 싸워보기도 전에 스스로 허물어지게 만들고 있었다.

여명이 터오자 방백린은 고개를 저었다. 벌써 수하 두 명의 목숨을 속절없이 잃었다. 정면승부를 해도 밀릴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렇듯 속절없이 수하를 잃는다면 그 결과는 뻔했다. 그리고 철혈보는 그것을 노리고 있을 것이었다.

마차를 이용하지 않고 경공으로 은밀하게 움직였다면 이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마차를 이용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렇듯 일방적으로 쫓기게 된 것은 섭장천 때문이었다. 섭장천에게 그들의 웃어른들이 말하는 역혼기가 닥친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죽은 듯 잠을 자야하는 그 시간.

신검산장을 아주 여유롭게 빠져 나오기는 했으나 정신력으로 버티던 섭장천이 들어 눕게 된 것이 이렇듯 일방적으로 쫓기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섭장천은 아직 버티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직 약을 들지 않아 고통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얼마나 참을 수 있을까? 방백린은 오히려 걱정스러웠다.

다행스러운 것은 청마수 호광과 흑마조 형가위가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했다는 점이었고, 아홉째 사제인 정운학의 내상도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둠이 가시면 마차를 더 빨리 몰 수 있을 것이다. 신검산장을 떠나올 때 사흘 정도의 거리로 예상했지만 이미 그 예상은 빗나갔고, 철혈보의 태도에 따라 더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낮이라면 그들의 기습은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었다.


문제는 철혈보가 자신들의 행선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들의 행보가 늦추어지는 동안 그들은 미리 앞을 차지하고 기다린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리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기습하지 못할 터였다.

철혈보에 귀띔을 해 준 것은 분명 풍철영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풍철한이 신검산장에 들어간 후 풍철영과 이야기를 나눈 후에 혼절했음을 알려주는 사실이기도 했다. 풍철영의 신분으로 보아 풍철한에게 조사를 지시한 것은 그였을 것이다. 풍철한은 얼마 만큼보고 온 것이라? 그리고 어디까지 말해 준 것일까? 그는 답답한 마음을 안고 조용히 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두려운 것은 없었다.


어차피 시작할 때는 되었다. 다만 사매 운령의 말대로 시기가 무르익지 못했다. 천하를 얻는다는 것은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질 때 가능하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졌다 해도 민심(民心)이 동(動)하고 천심(天心)이 열릴 때 가능한 것이다. 아직은 이르다. 일년이란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모든 것이 무르익을 텐데 너무 일찍 자신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방백린은 생각을 떨쳐버리듯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천하대계가 아니라 추격하는 철혈보 인물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였다. 그들이 자신들의 행선지를 안다면 그 여정에서 자신들과 맞부딪칠 수 있는 곳은 오직 두 군데였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을 노릴 터였다. 많은 희생이 따를 터이지만 피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속절없이 수하들이 죽어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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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심경(玄心經)의 심법은 내상을 다스리는데 있어 특이한 효능이 있었다. 사부가 가르쳐 준 세 가지 무공 중 하나인 현심법은 도가(道家) 계열의 심법이었다. 선천진기(先天眞氣)를 생성해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여러 가지 기운 중 탁기를 제거하고 끊임없는 활기를 축적해 나가게 하는 심법이었다.

더구나 선천진기를 몸 안에서 생성해 갈무리 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이로운 점이 있었다. 혼절하여 무의식 상태에 있더라도 선천진기는 그의 몸을 원래대로 회복하고자 자연스레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생존본능이 그것을 움직이는 것인지도 몰랐다.

현심법으로 대주천을 하고나면 언제나 청량한 기운이 휘감아 돌면서 대맥부터 세맥까지 깨끗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청량한 기운은 대주천 후에도 자신의 전신을 돌면서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새벽의 싸늘한 기운이 그의 전신을 파고들었지만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이미 본격적으로 겨울철로 접어든 산야는 메마른 황량함만 안겨주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있는 곳은 피했다. 그는 산길을 달렸고, 동굴에서 잠을 청했다. 그의 행적이 밝혀지면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쯤은 이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누가 적인지 모르는 가운데 그의 행적이 밝혀지면 여러 가지로 번잡스런 일에 휘말릴 터였다.

이제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을 알았고, 이해했다. 그들의 목적도 대충이나마 감지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예상할 수 있었다.

우선 풍철영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왔으니 분명 비원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찾을 것이다. 천지회 역시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으니 그가 신검산장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을 터였다. 백련교도들 역시 마찬가지. 전 이목이 그의 행적을 발견하기 위하여 집중되고 있을 터였다.

더구나 진정한 흉수가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면 그 흉수는 지금까지의 그의 행적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조사하는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볼 것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죽이려 들 것이다.

아쉬운 것은 변장술(變裝術)이었다. 그는 세 가지 무공 외에 무림에서 몸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는 생존기술을 다섯 가지 배운 적이 있었다. 추적술(追跡術), 은신(隱身)과 잠입(潛入), 독(毒), 암기(暗器), 병법(兵法)과 진식(陣式), 꽤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는 않았다.

다섯 명의 전문교두는 그가 세 가지 무공이 어느 정도 몸에 익숙해 질 때쯤에서 한명씩 찾아왔다. 사부의 안배임을 알았고, 그는 배웠다. 하지만 전문교두 중 한 달 이상 머문 자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그러한 기술을 배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진식의 경우만 하더라도 진식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와 그 위력 정도, 독(毒)이라 해도 독을 다루는 자들이 사용하는 하독 방법과 종류 정도였고, 상대의 하독 시 독의 침투를 막기 위해 혈을 막는 방법 정도. 그나마 추적술은 제대로 배운 셈이었다. 아마 가르친 목적은 직접 사용하라고 한 것이 아니고 그런 기술을 가진 상대에게 당하지 말라는 데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 정도만으로도 매우 유용했으나 아마 상당한 경지에 오른 자들을 만나면 무용지물과 다름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변장술에 대해서는 배운 바가 없는 문외한이었다. 더구나 인피면구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고도의 역용술(易容術)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고, 하다못해 수염 하나 붙이고 떼는 것조차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다. 머리 속에 든 것이 없으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은 진리인 모양이었다.

신검산장에서 개봉까지는 관도로 말을 달리면 이틀 정도면 충분한 거리였다. 하지만 인적이 드문 산길을 택했다. 그로인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그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었다면 어려운 길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은 노출되어 있었다. 이제는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상대를 파악해야 했다. 자신의 노출은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는데 커다란 장애가 될 수 있었다.

그래도 사람은 먹어야 한다. 입어야 한다. 그리고 자야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자는 것이야 동굴을 찾아 들어 자면 되었다. 긁히고 찢어진 옷은 대충 가릴 정도면 된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먹는 문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급하게 신검산장을 벗어나는 바람에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 토끼나 꿩 정도의 날짐승이라도 눈에 뜨이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겨울로 접어든 황량한 산야는 그에게 은혜를 베풀 정도의 아량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틀 동안 산 속을 헤집고 다닌 끝에 그는 농가(農家)라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냥꾼의 움막이나, 깊은 산속에 들어와 화전(火田)을 일구는 농가라도 보이면 좋으련만 그런 운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마을에서 떨어진 외진 민가라도 찾아야 할 판이었다.

그런 그에게 산속에서 내려오자마자 조그만 반점(飯店)이 나타난 것은 다행이었다. 아마 오십이 넘은 듯한 주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 같았는데 그것만으로는 힘들어서 집 한쪽을 내어 반점을 하는 사람 같았다. 담천의는 반점 안에 주인 내외만 있음을 파악하고 들어섰다. 다른 손님이 있었다면 그는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주인 내외는 저녁 늦게 찾아 온 낮선 손님을 반겨하지 않았다. 산을 헤매었는지 옷은 여기저기 찢겨져 나가고 검을 든 모습이 낯설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은덩이의 위력은 언제, 어디서나 그 위력을 발휘했다. 삼년간 표국 생활을 하며 쓸 곳이 없어 모아 두었던 은덩이가 이리도 유용하게 쓰일지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그는 간단한 음식을 맛있게 먹었고,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주인 내외로부터 필요한 몇 가지를 얻었다. 솜을 넣은 무명옷은 겨울 산중을 가야할 때 꼭 필요했고, 쌀알은 허기를 메우게 해 줄 것이었다. 그가 충분한 대가를 주고 떠나자 주인 내외는 손 안에 든 은덩이를 바라보며 매우 만족해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 다음날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것은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문제는 그들 입이었다. 손님이 뜸하다보니 의심이 가지 않는 손님들 하고는 세상 돌아가는 말을 나누게 마련이었다. 떠돌이 상인인 듯한 세 명이 지나가는 말로 물은 것을 친절하게 대답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담천의의 뒤에 누군가가 따라 붙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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