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맥클린의 노래 <빈센트>로 수업하던 날

"고통이란 말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나요?"

등록 2005.06.30 00:18수정 2005.06.30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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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 '제정신, 혹은 정신이 온전함'이란 뜻을 지닌 'sanity'란 단어가 있다. 며칠 전 나는 이 단어가 들어 있는 팝송으로 수업을 하다가 민망스럽게도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별똥별이 밤 하늘을 비켜가듯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행히도 눈치챈 아이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여러분, 화가 빈센트 반 고흐를 아시지요? 그는 스물일곱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서른일곱 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약 10년 동안 1만6천 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중 팔린 작품은 단 한 작품. 그가 죽은 뒤 10년이 지나서야 그의 그림은 진가를 발휘하지요. 그리고 약 100년이 지난 뒤에 한 가수가 그의 고독했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빈센트'란 아름다운 노래를 지어 바칩니다."

여기까지 말한 다음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노래가 흘러나왔고, 노래가 끝나자 칠판에 적어 놓은 영어 가사를 우리 말로 풀어서 설명해 주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울컥해지고 만 것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말이다.

'당신이 뭘 말하려 했는지 나는 이제 알 것 같아요. 당신이 온전한 정신을 갈구하며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나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얼른 음색을 바꾸어 아이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 정신이 온전하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아이들은 얼른 대답을 못했다. 나는 쉬운 예를 하나 생각해 냈다.


"만약 우리 나라가 과거처럼 다시 일본의 속국이 된다면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괴로워할까요? 온전하지 않은 사람이 괴로워할까요?"
"온전한 사람이요."
"맞아요.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은 나라 잃은 슬픔에 고통을 겪을 테지만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 기회를 자신의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하겠지요. 그런데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더 고통을 겪어야 한다면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서 온전한 정신을 가지지 말아야 할까요?"

아이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쪽이든 문제가 없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빵 굽는 기술자가 있었어요. 하루는 사장이 빵에 설탕을 넣지 말고 사카린을 넣으라고 해요. 사카린은 설탕에 비해서 값도 싸고 당도도 높지만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지요.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치명적이어서 정신이 온전한 기술자로서는 사장의 명을 따를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사장의 말을 거역했고, 사장은 기술자에게 회사를 그만 두라고 해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왜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이상과 현실, 그 선택의 기로에 미리 서 보게 하려는 것이다. 인간의 온전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연습 말이다. 지금의 입시 위주 교육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나는 빵 굽는 기술자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만약 제가 빵 굽는 기술자라면 우선 빵에 사카린을 넣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그것은 많은 어린이들을 서서히 죽이는 일이고, 그런 흉악한 짓을 하려고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돈을 못 버는 것은 아니에요. 직종을 바꿀 수도 있고, 아니면 작은 빵집 사장이 되어 직접 빵을 만들어 팔수도 있겠지요.

물론 사카린이 아닌 설탕을 넣어서 빵을 만들어야지요. 그러면 생산비가 너무 많이 들어 장사가 안 될까요? 그런 착한 생각만으로는 현실 사회에서 적응하기 어려울까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에요. 지금은 과거와는 달리 빵에 사카린을 넣지 않아요. 그런 빵을 만드는 사람은 감옥으로 가고 말지요. 그만큼 사회가 발전한 거지요.

그런데 사회가 그냥 발전했을까요?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고통을 겪으면서 얻어낸 소중한 결실이지요. 어때요? 고통이란 말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나요?"

덧붙이는 글 | 경향신문 교단일기에 기고한 글을 깁고 보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경향신문 교단일기에 기고한 글을 깁고 보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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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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