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때문에 행복하다는 말은 좀 가식 같아요"

베이스 기타를 치는 아이

등록 2005.08.16 07:54수정 2005.08.16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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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8월 23일이 생일 맞지?"
"예, 맞아요? 왜요?"

"우리 생일 한 달 전부터 편지 주고받기로 했잖아."
"아참. 깜빡했어요."

"첫 편지에 네 꿈 이야기 쓰는 거 알고 있지?"
"네 알아요."

지난 8월 11일, 학교 등교일에 한 아이와 나눈 대화이다. 집으로 전화를 해도 잘 되지 않아 메일을 보냈지만 연락이 닿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학교에 하루나와 봉사를 하는 학교 등교일에 아이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난 끈질긴 구석이 없는 편이지만 스무 해 가깝게 꾸준히 해오고 있는 일이 있다. 생일을 맞은 제자들에게 선물로 생일시를 써주는 일이다. 지금까지 담임을 맡은 아이들에게 써 준 생일시가 어림잡아 800편은 될 성싶다. 해마다 아내는 이번에도 아이들에게 생일시를 써줄 거냐고 묻곤 한다. 내 대답은 늘 이런 식이다.

"글쎄, 그렇게 되겠지?"

생일시를 선물하는 조건으로 아이에게 메일을 보낼 것을 당부하면서 첫 편지에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쓰라고 한다. 생일 한 달 전부터 메일을 주고받는 것이 원칙이지만 게으름을 피우다보면 생일을 코앞에 두고 편지를 보내는 아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나눈 편지라고 해도 더욱 깊은 만남이 될 수 있는 작은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메일을 늦게 보내서 죄송해요. 제 꿈을 말하자면 음악가에요. 뭐, 어마어마한 건 아니고 밴드를 꿈꾸는 그런 거예요. 지금 열심히 저 혼자 베이스 기타를 배우고 있지만 언젠가는 밴드를 하겠죠. 음악은 당연히 좋아하는 거지만(게다가 전부 락) 영화도 좋아해요. 한때에는 잠깐 연출자가 되어 보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제 머리로는 한계일거 같아서 금방 관뒀어요. 쓸 말이 없어졌어요. 답장이 오면 그때 또 쓸게요.(웃음)


안녕! 어제 아내랑 동천에 운동하러 나갔다가 좀 피곤했는지 일찍 잠이 들었단다. 아침에 일어나서 혹시 하고 메일을 열어보았는데 너에게 편지가 와 있구나. 그런데 네가 음악을 좋아하고 베이스기타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뜻밖이다. 비가 올 듯한 날씨가 갑자기 맑아진 그런 기분이란다. 거기에 영화도 좋아하고 그 방면으로 깊은 관심도 갖고 있다니 진작 너랑 이런 대화를 하지 못한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란다.

이번 담임을 맡아 가장 보람을 느끼고 있다면 너와 대화를 통해서 많이 가까워졌다는 거야. 너도 네 주장이 강하고 성질이 있다면 있는 아이인데 요즘 독서를 통해서 생각이 깊어져서 그러는지 선생님하고 퍽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만큼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단다. 보통 아이들은 꿈이 없든지, 아니면 꿈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는 정도인데 넌 음악가로서의, 베이스 기타리스트로서의, 락 밴드의 아티스트로서의 당찬 꿈을 가지고 있으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참, 대학 진학은 어떻게 할 생각이니? 다음 편지에는 너의 현실적인 진로에 대해서도 듣고 싶구나. 그럼 곧 학교에서 보자. 안녕!

안녕하세요, 선생님! 몇 년간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본 적이 없는데 제 자신이 왠지 신기해요. 대학 진학은 뭐랄까, 아직은 생각이 없어요. 제 생각은 이래요. 대학을 가려면 자신에게 맞고, 원하는 과를 가야 하는데 전 제가 가고 싶은 과도, 대학에서 배우고 싶은 것도 없어요. 그럴 바엔 2년 또는 4년 동안 대학에게 퍼부을 돈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이 들어요. 좀 철없는 생각이지만요. 전 취업을 할 생각이에요. 취업을 하려면 성적관리도 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질 못하네요. 참, 선생님은 좋으시겠어요. 옆에 늘 같이 할 수 있는 분이 계셔서. 부러워요(왠지 서러운). 그럼 오늘은 이만 쓸게요.

안녕! 편지 잘 받았다. 대학 진학에 대한 너의 생각은 철없는 생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다. 공부에 대한 취미나 열의도 없으면서 남이 가니까 따라서 대학에 가는 아이들에 비해 네 자신의 생각대로 삶을 꾸려가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 대학에 가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책을 많이 읽는 건데 넌 이미 책을 늘 가까이 하고 있으니까 책이 너에게 새로운 지식을 줄 것으로 믿는다.

내가 부럽다고 했니? 늘 옆에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특히 서로 진실이 통하고 귀한 것이 같은 사람끼리 사는 것은 무엇보다도 행복한 일이란다. 너도 그런 짝을 갖게 되겠지. 오늘 밤에 생일시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그럼 오늘은 여기서 줄이마. 안녕!

베이스 기타를 치는 아이

너는 여자지만
너의 목소리도 여자답게 맑은 고음이지만
너에게서 굵직한 저음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였을까?
네가 베이스 기타를 배우고 있다는 말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면서도
너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단다.

나도 베이스 기타는 좋아하지.
화려하고 현란한 음으로
혼자서 무대를 독차지하지 않고
저음으로만 누군가를 받쳐주며
너의 소리를 만들어가는.
어딘지 고독해 보이면서도
초월한 듯 편안해보이기도 하는.

완도 수련회 두 번째 날
우린 동백나무 숲에서 대화를 나누었지.
제자와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넌 모를 거야.
완도에서의 모든 추억을 다 합쳐도
그 때의 뿌듯함만은 못할 걸.

그때 우린 인생이란 곡을
함께 연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난 퍼스트 기타로.
넌 베이스 기타로.
내 말에 곱게 귀 기울이다가
가끔 너의 음을 내기도 했었으니까.

언젠가 너의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그날은 너의 꿈이 영그는 날이기도 하겠지.
어서 그날이 왔으면.
어서 그날이 왔으면.


그날 동백나무 숲에서 우린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식이었다.
"선생님이 저희들 때문에 행복하다는 말은 좀 가식 같아요. 솔직히 저희들 때문에 속도 많이 상하시잖아요?"
"그럼 네 엄마 아빤 너 때문에 속상한 적 없니?"

"왜 없겠어요? 늘 속상해 하시죠."
"그럼 네 엄마 아빤 너 때문에 행복하시 않으시니?"

"아니요. 행복해하시죠."
"나도 그래. 나도 그렇다니까."

덧붙이는 글 |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기고한 글을 깁고 보탰습니다.

덧붙이는 글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기고한 글을 깁고 보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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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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