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성과 휴식, 교육해법이 될 수 있다

지리산에 다녀와 얻은 교훈

등록 2005.08.11 21:59수정 2005.08.12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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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서 잠깐 쉽시다.”

끝도 없이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산행에서 이 말처럼 반가운 말도 없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지프스’의 바윗덩어리처럼 어깨를 짓눌러온 무거운 배낭을 벗어 던지고 숨이 턱까지 차오른 지친 몸을 그 위에 부린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심호흡을 하여 몇 번 숨을 고르고 나면 금세 몸의 피로가 가신다.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일어날 때는 산 아래를 굽어보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가늠해보는 여유까지 생긴다.

멀리 눈길을 던지자 그림 같은 구름 사이로 백두대간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보인다. 순간, 나는 감격한다. 아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저 까마득한 길을 내가 걸어왔다니! 몇 분만 걸어도 다리에 힘이 빠지고 숨이 턱턱 막히는 나약한 인간의 몸으로 어떻게 저 아스라한 산길을 걸어올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 끝에 문득 떠오른 것이 자발성과 휴식이란 두 단어였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의 거리가 무려 33㎞. 출발지와 도착지까지 계산에 넣으면 백리가 넘는다. 이런 멀고 험한 여정을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시작해야 한다면 그 발걸음이 얼마나 무겁고 고통스러울까? 설령 스스로 선택한 산행이었다고 해도 멀고 가파른 산길을 휴식도 없이 단숨에 주파해야 한다면 곧 체력이 고갈되어 고통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이리라.

‘사점(死點)’이라는 운동생리학 용어가 있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심장박동과 호흡이 빨라져 운동량이 자신의 심폐능력 이상으로 커지게 되면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숨이 가빠지는데, 이런 상태를 사점이라고 한다.

이런 경우 적절한 휴식이나 호흡조절로 사점을 잘 극복하면 오히려 신체의 적응력이 좋아지지만, 초반에 너무 빨리 걷거나 휴식을 취하지 않고 무리하게 강행하면 사점을 효과적으로 극복하지 못하여 산행 내내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러한 사점의 원리, 혹은 자발성과 휴식의 개념을 우리 교육에 적용해볼 만하다. 가령, 어린 초등학교 학생이 방학인데도 꼭두새벽부터 밤늦도록 학원을 전전해야 한다면 그 아이의 내일이 온전할까?

더욱이 공부란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능률이 오르는 법인데 부모의 강요에 못 이겨 마지못해 하는 공부라면 과연 효과가 있을까? 초반에 아이를 너무 혹사시킨 것이 공부에 취미를 잃게 하여 오히려 학창 시절 내내 고통을 겪지는 않을까?


산을 내려가는 길에 가쁜 숨을 내쉬며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표정만은 해맑아 보였다. 스스로 선택한 고통은 곧 축복이었을까? 문득, 교육을 살릴 해법은 아주 간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발성과 휴식. 가정과 학교에서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둔다면 해마다 어린 생명들이 ‘사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일은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래 전에 지리산에서 만난 한 남학생이 생각난다. 그는 대입을 눈앞에 둔 고3 수험생으로 혼자서 지리산 종주를 하고 있었다. 중 2때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지리산을 종주했는데 고3이 되자 다른 친구들은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혼자서 오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도 처음에는 많이 망설였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한 달 내내 여행을 하는 것도 아니고 불과 3일 동안의 산행을 두고 고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 결심을 굳혔다고 했다.

장터목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나는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고등학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그는 성숙한 내면을 지니고 있었고 겸손하면서도 뚜렷한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학과 성적은 어쩐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뜻밖에도 전교 1등이라고 했다. 그날 그가 잠자리로 떠나면서 한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산에 오길 잘했어요. 내려가면 정말 맑은 정신으로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덧붙이는 글 |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을 깁고 보탰습니다.

덧붙이는 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을 깁고 보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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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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