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코카콜라 자판기가 몇 개야?"

[산티아고 일기 9] 부르고스에서 까리온까지 걷고 또 걷다

등록 2005.08.18 19:33수정 2005.08.2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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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나무가 우거진 길을 걷고 있는 닐스크리스티안. 온타나스 가는 길.
이른 아침, 나무가 우거진 길을 걷고 있는 닐스크리스티안. 온타나스 가는 길.김남희
당신이 불러도 그들이 대답하지 않으면,
혼자서 걸어가라.
그들이 면벽한 채
움츠리고 떨고 있다면
오 불행한 이여,
마음을 열고 혼자 외쳐보라.
황야를 건널 때
그들이 당신을 버리고 떠난다면,
오 불행한 이여,
가시밭길을 내딛고,
붉은 피를 흩뿌리며,
혼자서 걸어가라.
폭풍이 몰아치는 밤
그들이 빛을 밝혀주지 않는다면,
오 불행한 이여,
고통이 번개불로,
당신 가슴에 불을 붙여라.
그리고 홀로 타게 내버려두라.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에크라 차로레(Ekla Chalore, 혼자서 걸어가라)>



가도 가도 끝없는 밀밭길.
가도 가도 끝없는 밀밭길.김남희
2005년 7월 11일 월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아침 1.9 + 점심 5.73 + 숙박 5 + 저녁 7.5 = 20유로
오늘 걸은 길 : 부르고스(Burgos) - 온타나스(Hontanas) 33km


새벽 6시에 길을 나선다. 어제부터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닐스크리스티안이 함께 걷겠다며 따라 나온다.

오늘은 발이 무겁다. 날도 뜨겁다.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이라고는 끝없는 밀밭뿐. 드디어 메세타(Meseta) 지역에 들어선 거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전체 길 중에 풍경은 가장 단조롭고 기후는 가장 혹독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장 힘들다는 구간. 이 길의 악명이 하도 높아 시간이 부족하거나, 의지가 박약한 이들은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의 메세타 지역은 버스를 타고 통과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도 많고, 아직은 의지도 충만한 나는 그냥 묵묵히 걸어서 가는 수밖에.

순례자들에게 마리아 목걸이를 나눠주고 계시던 수녀님. 온타나스 가는 길.
순례자들에게 마리아 목걸이를 나눠주고 계시던 수녀님. 온타나스 가는 길.김남희
걷는 길에 프랑스인 벤자민이 합류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는다. 오늘의 주제는 유럽의 이민사회. 닐스크리스티안은 덴마크의 아랍인 이민 사회에 대해 부정적이다.


"난 배타적인 민족주의자는 아니야. 하지만 다른 나라로 이민을 왔으면 그 나라의 문화에 동화하려는 노력을 하든가,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문제는 만들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니야? 아랍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지 알아? 같은 이민사회여도 베트남인들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얼마나 조용히 잘 살아가는데! 난 점점 이슬람사회에 대해 적개심을 갖게 돼. 그들이 덴마크 여자들에게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아?"

"너무 언론이나 방송을 믿지는 마. 한 사회에 문제가 생길 때면 이민자들을 비롯한 사회의 약자들에게 문제를 돌리려는 경향은 어느 사회나 있기 마련이잖아. 쉬운 타깃이니까.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건 얼마나 편리하고 안전하니. 아랍인이 아니라 해도 어느 사회에나 문제는 늘 있잖아."


벤자민이 말을 이어가며 나를 거든다.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아프리카에서 무슬림들이 들어오게 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 우린 값싼 노동력이 필요해서 그들을 데려 왔어. 이민을 장려한 거지. 그리고 집단 거주 지역을 만들고 그곳에 거주하게끔 했어. 그런데 거긴 아무 것도 없어. 나도 어렸을 때 잠시 그런 지역에 살아 봤는데 거긴 완전히 소외되고 낙후된 지역이야. 도서관도, 공원도, 문화 시설도, 아무 것도 없어.

오직 공장과 싸구려 집들이 늘어서 있을 뿐이고, 부모들은 돈을 버느라 아이들을 돌 볼 시간이 없어. 청소년들이나 어린이들이 할 수 있는 것, 즐길 수 있는 시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그들은 그냥 방치될 뿐이야. 그런 환경에서라면 자연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분출구를 찾게 되고, 자기가 속한 사회에 반감을 가지기 쉽지. 그러니 이민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할 땐 이민 집단이 형성된 배경과 한 국가가 이민 사회에 제공하고 있는 인프라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어."

"프랑스 사회에서 흥미로운 건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의 사회야. 중국인들은 경제적으로 완전히 프랑스 사회 속으로 동화해. 그들은 불어를 배우고, 프랑스인들과 거래하고, 그들을 상대로 돈을 벌어.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들 문화를 지켜가지. 하지만 한국인들은 달라. 그들 중엔 불어를 못 하는 사람도 많아. 그들은 프랑스 사회 내의 한국인들을 상대로 돈을 벌고 장사를 해. 문화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프랑스 사회로 동화되지는 않아. 하지만 이 두 사회의 공통점은 어느 쪽도 프랑스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는 거지."

한국인 여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다는 벤자민의 프랑스 내 한국 사회에 대한 지적은 따끔하다.

히피들의 마지막 남은 안식처 같았던 산 볼의 알베르게.
히피들의 마지막 남은 안식처 같았던 산 볼의 알베르게.김남희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도 길은 끝이 없다. 오늘 따라 태양은 왜 이렇게 뜨거운지 이렇게 걷다가는 길 위에서 장렬하게 전사할 것만 같다. 더위를 참지 못한 우리는 잠시 길을 틀어 산 볼(San Bol)의 알베르게로 향한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그곳에는 작은 숲과 샘물이 있어 지친 순례자들이 쉬어 가는 곳이다. 과연 정신이 번쩍 나도록 서늘한 샘물이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 있었다. 그 물에 발을 담그고 좋아하는 닐스크리스티안을 웅덩이로 밀어 넣었다.

"앗 차가워! 동양에서 온 예의 바른 네가 이런 짓을 할 줄이야! 음… 하지만 좋은 걸!"

나도 물에 발을 담그고 온 몸에 달라 붙었던 더위를 물리친다.

이곳 산볼의 알베르게는 마지막 남은 히피들의 안식처 같다. 담장의 벽화에는 부처와 예수가 사이좋게 세상을 관장하고 있다. 화장실, 샤워실도 없고, 시설은 원시적인 알베르게. 하지만 술과 음식과 노래를 나누는 곳.

나무 그늘 밑에서 늘어지게 낮잠이나 잤으면 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다시 배낭을 짊어 멘다. 함께 걷던 닐스크리스티안이 말한다.

"오늘 너와 같이 걸을 수 있어서 참 행복해."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듣는 다는 건 얼마나 큰 기쁨인가.

이른 아침 첫햇살을 받고 있는 카스트로해리즈.
이른 아침 첫햇살을 받고 있는 카스트로해리즈.김남희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오늘의 목적지인 온타나스(Hontanas)에 들어섰다. 온타나스는 언덕 밑에 숨겨진 그림처럼 작고 예쁜 마을이다. 이곳 알베르게의 시설도 깨끗하고, 훌륭하다. 방안에 들어서니 방안에 2층 침대 두 개와 싱글 침대 하나가 있기에 얼른 싱글 침대에 짐을 푼다. 카미노를 걷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천장이 없는 침대에 자본다!

같은 방을 쓰게 된 덴마크에서 온 앤디, 독일에서 온 크리스틴, 닐스크리스티안과 저녁을 함께 먹었다. 크리스틴은 이 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코카콜라와 펩시콜라, 정유회사 쉘이 후원한다는 걸 알려 준다. 어쩐지 그 작은 마을마다 코카콜라 자판기가 있더라니 그게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그 이야기에 닐스크리스티안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고 말한다.

"여긴 유럽인의 정신이 깃든 유서 깊은 길인데, 이 길을 미국 문화의 상징인 코카콜라 같은 회사가 후원한단 말이야? 지금처럼 아무런 표시도 안 하면 모르지만 '코카콜라 후원' 이런 딱지라도 붙이는 날엔 가만 있지 않을 거야."

"뭐 어때? 누가 됐든 후원만 해주면 괜찮은 거 아니야? 난 상관없어."

크리스틴이 그 말을 받는다.

"우리도 서울에 인사동이라고 유서 깊은 거리가 있어. 그 거리에 스타벅스가 들어오겠다고 했을 때 시민단체에서 반대운동을 했어. 결국 스타벅스가 들어오긴 했는데 스타벅스 역사상 처음으로 한글 간판을 달고 들어 섰어. 최소한 그런 식으로 뭔가 정체성을 지켜나가려는 노력은 필요할 것 같아."

"맞아. 난 정말이지 이 길 곳곳에서 코카콜라 후원이라는 간판을 보며 걷고 싶지는 않아."

나 역시 이런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길을 후원하는 곳이 이왕이면 사회적 책임감이 높고 역사도 깊은 유럽의 공익단체나 회사였으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2005년 7월 12일 화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아침 2.8 + 숙박 5 + 점심 4 + 음료수 0.7 + 저녁 7.5 = 20유로
오늘 걸은 길 : 온타나스(Hontanas) - 보아딜야 델 카미노(Boadilla del Camino) 29km


끝없이 펼쳐진 밀밭을 보며 가야 할 길을 가늠해보는 순례자들.
끝없이 펼쳐진 밀밭을 보며 가야 할 길을 가늠해보는 순례자들.김남희
피로가 풀리지 않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5시 반에 길을 나선다. 오늘도 같이 걷는 닐스크리스티안이 말한다.

"명상하듯 걷는 기분이 너무 좋다. 오직 새소리와 바람소리만 들려오고, 하늘만 보고 걷는 기분이 너무나 상쾌한데!"
"난 아침에는 해가 뜨기 전까지 침묵하면서 걷는 게 좋아. 이렇게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대지와 호흡하면서."
"그래서 네가 이른 아침에는 별로 말이 없는 거구나. 이제 아침해가 떠오르기 전까지는 너한테 말을 걸지 않도록 노력할게."

우리는 마주 보고 웃는다.

오전 7시 반. 카스트로헤리즈(Castrojeriz) 도착. 산티아고 성인이 사과나무에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보았다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아침을 먹었다.

오전 8시, 다시 걷는다. 한 시간 후, 가파른 고개를 넘어 언덕 꼭대기에 섰다. 그곳에서 영국인 자원봉사자 할아버지의 트럭을 만났다. 그는 카미노에 매료되어 은퇴 후 이렇게 캐러밴을 끌고 다니면서 응급 치료도 해주고, 순례자들에게 음료와 빵도 대접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제공하는 과자와 음료를 맛있게 먹고, 다른 순례자들을 위해 적은 돈을 기부하고 다시 출발.

다음 마을 이태로 델 카스티요(Itero Del Castillo)에는 11세기의 성당을 복원해 개조한 알베르게가 서 있다. 지금까지 본 알베르게 중 가장 어여쁘다. 이태리의 성인을 모신 곳이라 이 성당의 복원도 이태리에서 맡아서 하고, 자원봉사자들도 계속 이태리 사람들이 맡는다고 한다.

성당의 제단 근처에는 이 성당의 복원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죽은 후 이곳에 묻히기를 원했던 이태리인 할아버지의 무덤이 있고, 그의 사진이 있다. 이곳 자원봉사자들이 우리를 불러 의자를 내주고 빵과 차를 권한다. 마침 배가 고팠던 터라 우리는 차와 빵을 맛있게 먹는다.

이 작은 알베르게에는 침대가 8개밖에 없다. 부엌은 없지만 호스피탈레로들이 저녁과 아침을 준비해 다함께 나눈다. 그리고 저녁 미사 후에는 자원봉사자들이 순례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게 전통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성당 만큼이나 아름다운 사람들이고, 아름다운 전통이다. 다음에 카미노를 걸을 땐 꼭 이곳에서 머물리라고 다짐한다.

카미노에 매료되어 은퇴 후 순례자들을 위한 자원봉사에 앞장서고 있는 영국인 할아버지.
카미노에 매료되어 은퇴 후 순례자들을 위한 자원봉사에 앞장서고 있는 영국인 할아버지.김남희
오후에도 닐스크리스티안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다. 올해 나이 스물인 그는 북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몇 달간 일을 해 1년 정도 여행을 다녔다. 그래서 나이에 비해 많은 곳을 여행했다. 그는 영어(정말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의 영어 교육을 참관하고 싶다. 그들의 영어 구사 능력은 유럽인들 중에 가장 뛰어난 것 같다)와 독어를 능통하게 구사하고 불어도 약간 한다.

닐스크리스티안은 작년에 두 달간의 중국 여행을 한 이후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한참 빠져 있다. 내가 "네가 지금 동양을 바라보고 느끼는 수준은 딱 오리엔탈리즘이야"라고 아무리 놀려도 끄덕도 않는다.

그리고 그가 쓰는 '극동(Far East)'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내가 "우리가 왜 극동이니? 그건 너희들의 기준에서나 그런 거지"라고 지적하면 잠시 쭈뼛거릴 뿐 다시 그런 표현을 쓴다.

그가 아시아의 공동체 문화에 빠지는 것처럼 나도 한때 유럽의 개인주의적 문화를 선호하기도 했다.

"너, 그거 알아? 중국에서는 젊은 애들이 다 깨끗하고 단정했어. 덴마크에서는 어떤 애들은 지저분하게 보이려고, 외모에 신경 안 쓰는 것처럼 보이려고, 화장실에서 긴 시간을 보내기도 해. 얼마나 웃기는 짓이야? 또 내가 중국에서 놀란 건 어디에도 낙서가 없이 너무나 깨끗하다는 거야. 덴마크를 비롯한 유럽에서는 낙서가 얼마나 골칫거리인데!"

"넌 지금 아시아에 대해서 네가 바라보고 싶은 것만 바라보고 있어. 하지만 그건 네 나이 때의 내 모습이기도 해. 넌 이제 겨우 스무살이잖아. 지금은 세상의 정면만 바라볼 때지.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상엔 다른 면이 있다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고, 그게 더 중요할 때가 많다는 걸 깨달아 갈 거야. 하지만 또 나이 들어간다는 일의 위험성이 있기도 해. 자기의 경험에서 나온 것들을 전부로 이해하기 쉽고, 자신만의 벽을 쌓기도 쉬우니까. 하지만 네 나이 때,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고,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그 때 보는 세상은 나이 들어 만나는 세상과는 또 다르니까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해."

"응. 그러려고 해. 지금은 세계가 나에게로 와서 나를 만들어가도록 할 거야. 좀 더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 그땐 내가 세계를 새로 건설해 가고 해석해 갈 수 있겠지."

"남희. 난 지금 너와 걷는 게 너무나 즐거워. 하지만 혹시라도 네가 혼자 걷고 싶어지면 언제라도 내게 말해. 당황하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그럴게."

“우리도 성지 순례 중이라구요.” 가끔은 양떼, 혹은 소떼들과 사이좋게 걸어야 하기도 한다.
“우리도 성지 순례 중이라구요.” 가끔은 양떼, 혹은 소떼들과 사이좋게 걸어야 하기도 한다.김남희
올 가을 대학에 들어가 중국어를 공부할 예정이라는 닐스크리스티안. 그의 앞길에 펼쳐질 삶이 풍부하고 아름답기를.

오후 2시. 마침내 오늘의 목적지, 보아딜야 델 카미노에 도착. 여기 알베르게는 정말 환상이다! 수영장이 딸리고 초록 잔디가 그림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알베르게. 닐스크리스티안은 바로 수영장으로 뛰어든다.

수영장 앞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더위가 식혀지는 것 같다. 반면에 마을은 이 환상적인 알베르게를 빼면 아무 것도 볼 게 없다. 낙후되고 소외된 시골 마을의 전형이다. 저녁을 먹고 동네를 둘러보다가 다들 실망감으로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침대에 누우니 온 몸이 쑤셔온다. 어깨부터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2005년 7월 13일 수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아침 3.6 + 저녁 7 + 숙박 5 + 음료 1.7 = 17.3 유로
오늘 걸은 길 : 보아딜야(Boadilla) - 까리온(Carrion) 27km


오늘도 새벽 5시에 눈을 떠 5시 반에 걷기 시작한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을 못 찾아 한참을 헤맨 후에 숙소로 다시 돌아와 6시가 넘어서야 제대로 출발했다.

오전 7시 반. 프로미스타(Fromista) 도착. 여기까지 오는 강변길에 모기가 얼마나 극성이던지 수건과 모자로 얼굴을 다 가리고 걸었는데도 몇 방씩 물리는 걸 피할 수 없었다. 아침부터 수건 둘러쓰고 걷느라 사우나 한 번 제대로 했다.

오전 10시. 레벤카(Revenca) 도착. 이제 목적지까지 12km 남았다. 오늘은 왜 이렇게 힘이 드는 걸까? 어깨도 너무 아프고, 아무런 기운이 없다.

오후 1시. 드디어 카리온(Carrion) 도착. 너무나 힘든 길이었다. 온 몸을 태울 듯 감겨오는 햇살, 1km마다 나타나는 거리 표지판과 끝없이 이어지는 밀밭이 나를 지치게 했다.

수영장이 딸린 보아딜야의 환상적인 알베르게. 지친 모습의 순례자 조각과는 달리 쉬고 있는 현대의 순례자들은 너무나 여유로워 보인다.
수영장이 딸린 보아딜야의 환상적인 알베르게. 지친 모습의 순례자 조각과는 달리 쉬고 있는 현대의 순례자들은 너무나 여유로워 보인다.김남희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슈퍼로 갔다. 오후 2시면 시에스타로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기 때문에 서둘러 장을 봤다. 내일 초반의 17km는 음식과 물을 구할 수 없다기에 내일 먹을 간식과 음료수도 미리 구입했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토마스에게 그림을 선물 받았다. 토마스는 열 네 살 난 어여쁜 딸 클라우디아와 함께 걷고 있는 스페인 아저씨. 늘 스케치북과 물감을 가지고 다니며 작은 마을을 그리곤 한다. 그가 그린 그림을 구경하다가 빌로아드 마을 그림을 마음에 들어하자 선뜻 내게 준다. 정성껏 그린 그림을 이렇게 기쁘게 나눠주는 그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고마운 마음에 음료수를 사서 대접.

요리할 의욕이 없어 간단하게 오믈렛을 만들어 닐스크리스티안과 나눠 먹었다. 점심 먹고 침대에 쓰러져 두 시간을 잤다. 자고 일어나 동네 산책하고 돌아와 파스타와 샐러드를 만들어 저녁을 먹었다.

저녁 먹는 자리에서 멋진 이야기를 들었다. 프랑스 청년 셋이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부터 여기까지 8000km를 걸어오고 있단다. 더 놀라운 건 그들의 종교가 각각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란다. 하긴 예루살렘은 이들 모든 종교의 성지이니 얼마나 완벽한 출발지인가. 서로의 종교에 관계없이 우정을 나누며 걸어오고 있는 이 아름다운 청년들을 어디선가 나도 만날 수 있는 행운이 왔으면 좋겠다. 지친 나를 기운 나게 한 참 아름다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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