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 스트레스? 우린 그런 말 몰라요

다국적 이주노동자들의 즐거운 한국어 교실을 가다

등록 2005.11.18 14:44수정 2005.11.1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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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앞두고 어김없이 초겨울 한파가 속살을 파고드는 건 단순히 수은주가 내려가는 물리적 현상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의 진로가 결정되다시피하는 대한민국이고 보면, 수능이 주는 중압감이야말로 체감온도를 더더욱 떨어뜨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수학능력시험을 비롯, 각종 국가고시에는 외국어시험이 단골처럼 빠지지 않습니다. 특히 청년실업이 심한 요즘 토익(TOEIC)이나 토플(TOEFL), 일본어능력시험(JPT) 같은 외국어시험은 취업 당락을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외국어를 배운다기보다 외국어시험을 준비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정도입니다.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외국어시험, 하면 머리부터 쥐어뜯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조상님들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다고 하셨다던데, 그 즐거움은 시험이란 괴물 때문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 시간 그 상식의 틀을 깰 수 있는 '즐거운 외국어 교실'을 소개할까 합니다. 바로 외국인이주노동자들이 우리말과 한글을 배우는 현장입니다. 지금부터 공부 중에서도 가장 골치 아프다는 '외국어 공부'를 하면서 스트레스는커녕 조금도 부담 없어 하는 '별난' 학생들을 만나보겠습니다.

a 성동센터 한국어교실 수업 장면

성동센터 한국어교실 수업 장면 ⓒ 고기복

먼저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한국어교실이 체계적이고 규모 있게 진행된다는 성동외국인근로자센터(아래 성동센터)를 찾았습니다. 성동센터를 방문한 지난 13일엔 마침 '생활 나눔 바자회'가 진행되고 있어서 센터 전체적으로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한국어 교실을 담당하고 있는 센터교육문화팀 김혜원 팀장의 안내로 초급2반에 들어서자, 바깥의 분주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환하면서도 진지하게 공부하는 열한 명의 다국적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스타킹? 스토킹? '아' 다르고 '어' 다르네!

마침 바자회가 있는 날이라 그런지 선생님이 학생들이 사온 물품들을 몇 개 들춰보며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이게 뭐지요?" 선생님이 스타킹을 들며 질문을 던지자, "스토킹!" 하고 누군가 자신 있게 대답하는 소리와 함께 교실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이건 스타킹이에요. 스-타-킹! 스토킹이 아니에요. 스타킹과 스토킹은 많이 달라요."

스타킹과 스토킹. 뜻으로만 따지면 전혀 연관이 없으니 틀렸다고 해도 큰 사고는 안 날 성 싶은데, '아' 다르고 '어' 다른 법, 짚고 넘어가는 걸 보면 여간한 선생님이 아니더군요.

선생님은 계속해서 자신이 입고 있는 옷과 부츠를 가리키며 몇몇 단어들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자리에 앉아 있는 정장 차림의 베트남 출신 학생을 일으켜 세웁니다.

"이 옷은 정장이에요. 여긴 옷깃이구요." 설명 중에 성이 안 찼던지 소매를 걷어 붙인 선생님이 한 학생을 직접 앞으로 나오게 하자, 학생들이 다들 손뼉을 치며 좋아합니다. 선생님의 설명에 앞에 나온 학생은 쑥스러운 듯 말이 없으면서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은 학생들은 열심히 받아 적는 모습이 꼭 말 잘 듣는 초등학생들 같습니다.

a 강 선생님이 학생을 앞으로 나오게 해 직접 물건을 짚어가며 한국말을 가르치고 있다.

강 선생님이 학생을 앞으로 나오게 해 직접 물건을 짚어가며 한국말을 가르치고 있다. ⓒ 고기복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과 짤막하게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맨 먼저 수업 시간에 예쁜 글씨체 때문에 눈길이 갔던 새신부 윤설매(32·중국)씨에게 물어봤습니다. 올 3월에 결혼했다는 윤설매씨는 느리지만 글씨만큼이나 또박또박 말하는 모양새가 야무지고 진지하여 듣는 사람마저 진지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한국어 공부 재미있어요?"
"재미있어요. 여기서 공부하고 연습하면 빨리 말할 수 있어요."

"아저씨? 결혼 안 하면 총각 아니에요?"

이번에는 모범생으로 보이는, 캄보디아 출신으로 한국에 온 지 1년 반이 됐다는 론피쇠씨에게 물어봤습니다.

"아저씨, 한국어 공부 왜 해요?"
"음…."

잠시 론피쇠씨가 말을 더듬는 사이 옆에 있던 윤설매씨가 끼어들었습니다.

"아저씨? 이 사람 결혼 안 했어요. 아저씨는 결혼한 사람 아니에요?"
"그래요? 그럼, 총각."
"하하(다들 웃음)."

똑똑한 학생에게 제대로 한수 배운 셈입니다.

정색을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론피쇠 총각, 한국어 공부 왜 해요?"
"외국 사람들 하고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어요. 나중에 대학에 가서 한국어 공부하고 싶어요."

같이 있던 인도네시아인 조꼬(Joko)씨가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조꼬는 산업연수생으로 98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생활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올 해 고용허가제로 재입국한 후, 한국어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인천에서 매주 2시간 걸리는 한국어 교실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어를 어떻게 알아요?"

순간 인터뷰 주객이 바뀌는 상황이 연출됐습니다.

제가 "인도네시아에 살았던 적이 있어요. 제 인도네시아 이름도 조꼬예요"라고 하자, "조꼬가 무슨 뜻인지 알아요?"라고 되묻더군요. 만만한 인터뷰이가 아니었습니다.

"조꼬는 족자 꼬레안이라는 뜻이지만, 족자에서 조꼬는 총각을 말하죠?"
"네, 맞아요."

"한국어 공부할 때 어떤 점이 어려워요?"
"한국어가 자바어처럼 높임말과 낮춤말이 있어서 어려워요. 하지만 그 점이 더 흥미롭게도 해요."

5년 전 한국생활을 하며 한국어를 배울 기회를 살리지 못했던 아쉬움을 더 이상 겪지 않겠다는 것이 조꼬의 의지였습니다.

a 한복을 차려 입은 한국어교실 학생들. 왼쪽부터 윤설매, 리스마, 조꼬, 강 선생님.

한복을 차려 입은 한국어교실 학생들. 왼쪽부터 윤설매, 리스마, 조꼬, 강 선생님. ⓒ 고기복

"연세가 어떻게 돼?" "목사님 밥 먹어!"

우리말도 이 사람들에겐 분명 외국어인데, 우리처럼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을까? 이곳에서 교사로 활동한 지 1년 반이 됐다는 강혜옥 선생님께 학생들 동기부여를 위해 어떤 시험을 치르는지 물어봤습니다.

"학기 초 반 구성을 하기 위한 레벨 테스트와 수업 시간에 보셨던 간단한 퀴즈를 시험이라면 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레벨 테스트 시험은 받아쓰기나, 냉장고 같은 그림을 그려놓고 한글로 쓰게 하는 정도구요. 퀴즈는 학생들이 헷갈릴 것 같은 어법 등에 대해 복습하는 차원에서 간단하게 묻고 답하는 정도예요. 가령 우리말의 높임말이 어렵잖아요? 학생들이 제대로 알았는지 물어보면, 대답들이 엉뚱할 때가 있어요."

"연세가 어떻게 되느냐?" "저는 나가"처럼 높임말과 낮춤말이 뒤섞이는 일이 흔하다는 강 선생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만했습니다.

한국에서 생활한 지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이주노동자들을 매일 만나는 기자의 입장에선 옆에 있는 사장님을 보고도 '이거 사장님'이라고 하거나, '목사님, 밥 먹어'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피식 웃던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초보적인 우리말과 글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야 오죽하겠습니까?

틀려도 그만, 맞아도 그만! 스트레스 받을 일 있나요?

얼마 전 우리말과 글을 배우기를 원하는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우리 쉼터에서 간단한 받아쓰기를 해 본 적이 있습니다.

a 쪽지시험(와유디 답안)

쪽지시험(와유디 답안) ⓒ 고기복

그중 특이하게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맞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의 나머지 답안을 살펴보니 틀린 답도 만만치 않더군요.

'손이 아파요'→'소니 아바요'
'맛있어요' → '마싰오요'
'말이 달려요' → '말리 달료요'
'달이 떴어요' → '달리 또세요'
'괜찮아요' → '괜차나요'
'국물이 맛있어요' → '공무리 마싰오요'
'한국말이 재밌어요' → '한국말리 체밋소요'
'저는 인도네시아에서 왔어요' → '저는 인도네시아에서 와소요'


연음이나 된소리를 제대로 적는 사람들이 흔치 않다는 건 한글을 처음 배우는 우리 아이들도 똑같다는 걸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가고, 자연스럽게 입 꼬리가 올라가게 합니다.

쪽지시험이 끝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위 답안지를 쓴 사람에게 농담으로 '사랑할 사람이 있나 봐'라고 하자, 다들 '와아!'하고 웃더군요. '틀려도 그만, 맞아도 그만'인 시험인지라, 확인 과정에서 다들 '아~~'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긁적이기도 합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내일 또 봐요"라고 하자, 다들 자신 있게 "좋아요"라고 답합니다. 시험 싫다고 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상할 따름입니다.

a 한글 공부를 했던 학생이 보낸 메시지

한글 공부를 했던 학생이 보낸 메시지 ⓒ 고기복

아무리 다들 열의를 갖고 공부한다 해도 세상에 스트레스 없는 수업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외국어인 우리말 공부를 스트레스 없이 즐겁게 합니다. 무엇보다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닌, 당장 일상생활에서 써먹을 수 있는 살아있는 외국어 공부인 탓이 크겠지요.

그렇게 공부한 학생들 중에는 가끔씩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오기도 하는데요. 올해 초에 받고 너무 행복해서 아직까지 지우지 않고 있는 문자메시지가 하나 있습니다.

다닥다닥 붙여서 쓴 "새해북만이받으세요"란 메시지는 '아나'라는 인도네시아인에게 온 거였는데, 저는 그 메시지를 'Book' 많이 받으라는 말로 받아들였고, 덕택에 올 해 공짜 책 여러 권 받았습니다.

이만하면 공부하는 학생이나 선생님 모두 행복한 외국어 수업도 있다는 사실 충분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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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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