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 너에게 그런 모습이 있었니?

과묵한 줄 알았던 이주노동자 하산의 놀라운 변신

등록 2005.12.03 18:52수정 2005.12.04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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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면 혼자 감당하기엔 버거울 만큼의 이주노동자들이 오가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문제를 갖고 왔었는지는 상담일지를 들춰 보지 않는 한 제대로 기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령 쉼터를 이용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출장 중일 때 전화를 해 오면 얼굴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일요일에 상담을 하고 간 이주노동자들은 그 다음날부터 전화를 해 와서 상담진행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묻곤 합니다. 질문을 할 때면 대부분 자신의 이름만 대고 무슨 일로 왔었는지는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무슨 일로 상담을 했었는지를 묻게 됩니다. 그러면 전화를 해 온 사람은 왜 자신을 모르는지, 왜 자신의 문제를 알아주지 않는지 섭섭해 합니다. 그럴 때면 전화를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짜증이 나기도 하고, 빚진 것도 없는데 빚쟁이가 따로 없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편 그렇고 그런 사연을 갖고 와서 이름만 갖고는 기억할 수 없는 많은 이주노동자들 가운데도,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눈에 확 들어왔었고 이름과 사연이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인 하산(30)이었습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지난 주 일요일이었습니다. 쉼터에 처음 들어 온 그는 쑥색 빵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는데, 잔뜩 겁에 질려 있는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말이 없었습니다. 하산은 점심이 지날 때쯤 쉼터에 와 있는 걸 얼핏 본 것 같은데, 상담을 접수하지 않았는지 저녁 8시가 다 될 때까지 사무실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그는 제가 상담을 정리하고 사무실을 나서려는 즈음, 머리에 쓰고 있던 빵모자를 손에 꽉 쥐고는 조심스럽게 사무실로 발을 들여놨습니다. 그리고는 문을 닫는 것이었습니다. 몇 시간을 쉼터에 있었지만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하산에게 무슨 일로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목까지 올린 잠바 지퍼를 천천히 내리더니, 안주머니에서 구겨진 봉투 하나를 꺼내 놓을 뿐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다. 그가 꺼낸 것은 약 봉투였습니다.

“어디 아파요?”
“맞았어요.”
“어디요?”


하산은 대답 대신 배와 가슴, 어깨를 가리키며 맞는 흉내를 내더니 입술을 씰룩거리며 때린 사람이 한 말을 흉내냈습니다. 말이 없는 그에게 답답함을 느낄 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밖에 기다리고 있던 하산의 직장 동료 수라완이었습니다. 사무실에 들어 선 수라완은 하산이 회사에서 맞아 쓰러졌었고, 회사 사람이 데려다 줘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병원 이름도 모르고, 병원에서 어떤 의견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약 봉투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하산이 먹은 약이 어떤 종류의 약인지를 물었습니다. 약사는 하산이 먹은 약은 구타 등으로 인한 피해가 있을 때 먹을 수 있는 약이라고 전하며, 의사에게 직접 물어 보는 것이 정확하지 않겠느냐면서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병원 측에서는 하산이 구타로 인해 엑스레이를 찍은 사실이 있지만, 제 3자에게 자세한 내용은 말해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어찌됐건 구타 사실에 대한 확인을 하고 회사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어봤습니다. 사측에서는 월요일에 병원에 대동하고 가기로 했는데, 쉼터에 갔다면서 화를 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회사에서 알아서 다 해 줄 테니, 하산에게 회사로 들어오라'고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하산은 눈망울의 흰자위가 드러나도록 크게 눈을 뜨더니, 옆에 있는 수라완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수라완은 하산이 무서워서 공장에는 다시 들어가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전해주었습니다. 두 사람을 보면서 하산이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인데, 구타를 당하고 더 말이 없어졌구나 하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겪어 봐야 안다는 말을 목요일 밤에 하산을 통해 절실하게 배웠습니다. 구타사건으로 고막이 터진 자국 출신 노동자 문제로 천안에 갔던 인도네시아 대사관의 기따사리(Gitasari) 서기관이 귀가 길에 우리 쉼터에 들러 쉼터를 이용하는 자국민들의 고충을 듣는 자리에 하산이 함께 할 때였습니다.

먼저 기따사리 서기관이 이주노동을 하면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국민들을 위로하는 인사말을 한 뒤, 출국 전부터 입국하여 일하기까지 어떤 어려움들이 있는지 털어놓으면 그 문제들을 풀기 위해 노력하겠다면서 대화를 시작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자국 외교관의 말에 그다지 신뢰를 하지 못하겠다는 쑥덕거림만 있을 뿐 선뜻 누가 나서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손을 들더니 발언을 신청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산이었습니다.

a 기따사리 서기관과 쉼터 이주노동자 대화 장면

기따사리 서기관과 쉼터 이주노동자 대화 장면 ⓒ 고기복

“먼저, 저는 해외취업을 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말하겠습니다. 저는 아직 총각이었을 때 취업신청서를 냈었는데, 지금은 애까지 딸린 가장입니다. 그 와중에 대통령이 세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저는 원래 촌놈인데, 지금은 주소가 자카르타입니다. 촌놈들 서류는 누군지 모르지만, 만날 아래로 내려놓는 사람이 있어서 출국하기 전에 주소를 옮겼습니다. 덕택에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느릿느릿하면서 또박 또박 털어놓기 시작한 그의 말에 자리에 함께 했던 친구들이 배꼽을 잡고 자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덕택에 자칫 형식적이고 딱딱한 분위기가 될 뻔했던 자리가 사심 없이 인도네시아 송출 관련 비리와 한국노동현장에서의 각종 인권침해 사례 등을 적나라하게 털어놓는 자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하산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래 말이 없고 숫기가 없는 사람인 줄 알았던 하산이 달변으로 좌중을 휘어잡을 만큼 느긋하면서도 아주 밝은 성격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산, 너에게 그런 면이 있었니?'라고 묻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불과 닷새도 안 된 사이에 그가 밝은 모습을 되찾은 건, 자신을 때렸던 회사로 돌아가지 않고,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원래 천성이 밝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요 며칠 옆에서 지켜보며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고 보면 수많은 외국인이주노동자들이 외국에 나와 주눅 들어서 그렇지, 고향에서는 나름대로 유머감각도 있고, 친구들과 웃고 즐길 줄 아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 사회가 제대로 이해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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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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