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둥아, 열 꼬쟁이는 남겨둬야 헌다"

[고향의 맛 원형을 찾아서 105] 곶감 미학과 추억 빼먹는 재미

등록 2006.01.16 13:54수정 2006.01.1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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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곶감을 대체 어디서 빼먹는단 말인가?


a 곧 흘러내릴 듯한 곶감만 보면 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곧 흘러내릴 듯한 곶감만 보면 내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 sigoli 고향

'곶감 빼먹듯 한다'는 말이 있다. 곶감을 빼먹는 건 알겠는데 대체 어디서 곶감을 빼먹는단 말인가. 어디에 끼워놓았기에 빼먹는다는 건가. 대꼬챙이에? 아니면 쇠꼬챙이? 그도 아니면 실이나 철사란 말인가?

21세기 지금도 곶감을 빼먹을까? 요즘엔 아무리 동네를 뒤져도 빼먹을 만한 게 없다. 아니, 누가 요즘 같은 세상에 곶감을 꼬챙이에 꽂아서 말릴까 보냐.

아쉽지만 '실에서 곶감 끓어먹듯 한다'로 바꿔야 할 판이지만 측백나무 잎 하나 옆에 깔려 있으면 어찌나 아름답고 향마저 끝내줬던가.

인적이 뜸한 동네 안을 헤매다가 수소문 끝에 궁색하기 그지없고 처량하기까지 한 시골집에 들어선다. 늦가을에 부지런을 떨었을 촌로 댁으로 들어가 겨우 눈에 익은 풍경을 마주하면 잃었던 내 물건을 되찾기라도 한 듯 한량없이 기쁘다. 그이의 정성이 고맙기까지 하다.

'곶감'을 '꽂감'으로 소리 내는 지역이 있다. '꽃감'으로 혼동해도 상관없다. 촘촘히 꼰 새끼줄 구멍에 균일하게 양쪽 균형을 맞춰 걸어둔 모양엔 꽃보다 아름다운 미학이 숨겨져 있다. 고종 임금께 진상했다는 진짜 감 고종시(高宗柹)가 초가집과 멋들어지게 어울려 산다.


그것 없으면 겨울이 을씨년스러웠다. 수분을 덜어냄과 동시에 자꾸만 밖으로 하얀 밀가루 같은 성분을 밀어낸다. 당분이다. 아버지는 "밤새 귀신이 와서 밀가루를 칠해놓았으니 빼먹지 말라"고 했다. 아마도 덜 만들어진 곶감을 먹은 아이가 변비나 걸리지 않을까 염려해서 갖다 붙인 이야기일 게다.

아이를 어르고 달랠 주전부리가 마땅치 않았던 시절 북풍한설 몰아치던 겨울 밤 울음을 뚝 그치게 할 묘약이 곶감만한 게 있었을까 부냐.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는 아직도 서너 살 꼬마들을 다루는데 결코 빠지지 않는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 비결이 뭘까? 과연 무엇이 숨겨져 있기에 그럴까.


a 늦가을 실에 꿴 곶감도 아름답다. 벌써 곶감이 쫀득쫀득 말랐겠다. 가족을 모으는 힘!

늦가을 실에 꿴 곶감도 아름답다. 벌써 곶감이 쫀득쫀득 말랐겠다. 가족을 모으는 힘! ⓒ sigoli 고향

싸리나무의 힘

별 것 아닌 물건 가지고 성화다 할까봐 걱정이다. 유익한 쓰임새를 찾아 한스런 넋두리 풀 듯 서리서리 주저리주저리 말하다보면 '옳거니! 자네 말이 맞네'하며 맞장구쳐줄 멋진 상상을 하며 다소 지루한 필담을 과시해볼 거나.

'비사리'나 '싸리비'는 대나무와 함께 빗자루를 만드는 데 쓰였다. 마당비를 만들려면 가지가 마구 난 싸리가 좋다. 흰싸리나무는 부러지기 쉬우니 참싸리만 쓰기로 하자. 한때 산업화를 득달같이 했을 때는 추수하기 바빠 죽겠는데 집집마다 할당량을 정해놓고 정부가 싸리씨앗도 적지 않게 거둬갔다. 사방공사엔 이만한 게 없었으니 이제 용서할 때다.

자귀나무, 아카시, 칡과 함께 콩과식물인 싸리나무는 꼬투리 모양이 닮은 콩과식물이다. 그러니 아무 데나 잘 자란다. 설이 째깍째깍 다가오면 가가호호 싸리나무를 베어 눈이 들이치지 않는 토방에 세워뒀다. 타닥타닥 큰소리 한번 내는 법 없이 싸르르 자그마한 소리를 내며 연기 한 방울 피우지 않는다.

화력도 대단해 참나무를 족히 이기고도 남는다. 불 조절도 쉬워 유과, 한과를 만들 때 즐겨 썼다. 더구나 그 가치를 더 쳐주는 집단이 있었으니 산을 헤매던 빨치산이다. 감시망을 피해 몰래 밥을 해먹어야 하니 명감나무가시 즉 청미래덩쿨보다 높이 쳐주던 나무다. 명감나무는 가시도 가시려니와 나뭇가지가 죽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었다.

싸리나무는 그렇다고 야산에 있지 않다. 어찌나 멀리에 있던지 헬기장이 있는 해발 700미터나 되는 백아산 차일봉 언저리에나 무성했다. 해마다 하얗게 핀 억새꽃과 어울려 사이좋게 숨어 있는 이 나무를 베어왔기에 각다귀는 보이지 않고 새로 올라온 붉고 순수한 줄기만 보였다.

a 송이버섯이 피어날 때 씨앗을 머금고 있는 싸리나무

송이버섯이 피어날 때 씨앗을 머금고 있는 싸리나무 ⓒ sigoli 고향

일년생이라 가지도 뻗지 않아 안성맞춤이다. 나긋나긋하고 발갛다. 속은 또 얼마나 노릇노릇하고 촘촘하던가. 두 팔을 벌려도 될 만큼 길고 맵시가 있다. 단단하여 삼태기를 만들어도 부러지지 않는다.

의적 임꺽정은 고리짝을 만드는 백정이었다. 고리버들과 싸리나무 껍질을 벗겨 궤짝을 만들어 파는 집안이었다. 백정이라고 소, 돼지만을 잡아 파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잘 휘지만 부러지지 않아 불리고 삶아서 상자를 만드는 데 요긴하게 썼다.

그만큼 광주리와 소쿠리, 바구니 만들기에 알맞도록 탄력이 대단하다. 대나무와 산죽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 나무는 탄성이 좋으니 휨과 처짐도 뛰어나다.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씹어보면 달달한 맛이 있어 토끼나 쥐가 갉아먹은 흔적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아까 나는 싸리나무가 콩과라 했다. 콩은 발효식품의 기본이 되는 곡식이듯 곶감 맛을 제대로 내도록 돕는다. 꼭지를 둘둘 묶어서 공기가 통하지도 않는 것과 애초에 다르다. 싸리나무를 꽂으면서 한번 질러줬기에 약간을 곯다가 말라서 말랑말랑하고 보드랍다.

쓸모없는 부분은 없어 적당히 물러 휠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수분을 밀어내는 등 건조효과도 탁월하다. 반대로도 작용하니 이 가느다란 나무의 구실은 말로 다 풀기 힘들다. 우리나라 건축엔 소나무, 땔감이나 숯으론 참나무, 과실수로는 배, 사과, 감, 대추나무가 각광을 받듯 싸리나무도 장점만을 모았기에 이토록 내게 둘도 없는 귀염을 받고 있다.

곶감 빼먹는 재미에 빠진 어린 귀신과 하느님

a 새끼줄에 집에서 쓰고 아이에게 주전부리 할 만큼만 깎아 걸어 둔 곶감이 아름답다.

새끼줄에 집에서 쓰고 아이에게 주전부리 할 만큼만 깎아 걸어 둔 곶감이 아름답다. ⓒ sigoli 고향

한편 집집마다 아이는 곶감 빼먹는 선수다. 아니 귀신이다. 어린귀신은 다 마르지 않고 홍시가 덜된 곶감을 오후 서너 시 아버지가 계시지 않을 때를 골라 한 개만 빼먹기로 다짐한다.

조심조심 다가가 곶감덕장을 만지면 통째 요리저리 제멋대로 움직인다. 가까스로 붙들어 놓고 '요놈 빼먹을까 저놈 빼먹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으니 낮도깨비가 잡아가도 모르겠네.

손에 걸리는 아무 거나 하나 쏙 빼서는 호주머니에 넣고 개구리가 파리를 채듯 혀를 날름 내밀어 꼬챙이를 잡아당겨 "쪼옥 쪽" 빨아대니 그 맛이 기가 막힌다. 하드 맛 처음 보았던 아이가 아이스깨끼 대를 입에 넣었다 뺐다 하듯 옆으로 훑어나가매 오돌토돌한 나무에 여린 입술이 다칠까 염려스럽다.

다시 주물러 아홉 개밖에 남아 있지 않은 줄을 고르게 펴서 아무도 손대지 않은 것처럼 위장한다. 열 개인 듯 간격을 조정하고는 홍길동 흉내를 내 공중을 휘돌아 폴짝 뛰어내려서는 뒤뜰로 감쪽같이 숨는다.

작은 방 아궁이 앞에 풀썩 주저앉아 오물조물 한동안 주물럭거리다가 한쪽을 떼었다. 멋대가리 없게 바로 집어넣지 않고 흰가루를 쭉 핥았다. 아이고나 달고나! 한 쪼가리를 입에 넣자 달달한 맛이 퍼져 밍밍하던 입 안을 가득 채웠다.

후루룩 흐르던 홍시와 달리 쫀득쫀득하고 차지다. 끈덕지다. 무름과 딱딱함의 딱 중간에서 서성인다. 베먹고 또 찢어먹는다. 감씨가 잡혀도 쏙 빨아서 한 손에 잡고 있다. 꼬마는 그마저 어금니로 바숴 배젖 빼먹는 맛을 잘도 아니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반에 반밖에 남지 않으면 더 잘게 쪼개 조각조각 나눈다. 곶감 하나 먹는데 20여 분이나 걸렸을까. 아직도 입안에선 쫄깃하고 달콤한 환각이 남아 있다. 아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齒) 사이에 낀 긴 여운을 꺼내 맛보며 동네 한 바퀴 돌려고 나섰다.

다음날 달달한 곶감 맛을 본 배꼽 때가 까만 귀신이 다시 작전을 감행했다. 스무 줄 가운데 손대지 않은 줄을 골라 또 하나를 빼먹었다. 축 늘어져 주르륵 흐를 것 같은 다소 까맣게 말라가는 곶감을 점찍었으니 어제보다 한결 부드럽다.

a 잘 말린 경북 상주 산 곶감에 하얀 밀가루 같은 것이 묻어있다. 중국산은 일부러 뿌리기도 한다.

잘 말린 경북 상주 산 곶감에 하얀 밀가루 같은 것이 묻어있다. 중국산은 일부러 뿌리기도 한다. ⓒ sigoli 고향

날이 싸늘해질수록 감나무를 얼씬거리던 까치도 곶감 주위를 맴돈다. 어떤 날은 한꺼번에 두세 개를 축낼 때도 있었다. 텃새인 참새도 얼쩡거린다. 그 달짝지근한 맛에 빠진 쥐새끼가 처마에서 역행하여 새끼줄에 매달려 있기도 했다.

축 처져 있던 곶감 물기를 쥐도 새도 모르게 빼먹은 차고 건조한 공기와 철모르고 빼먹은 어린 귀신 때문에 퍽이나 위로 치솟았다. 편평하게 걸려 있으니 원상복구가 되었다. 그런 곶감은 제아무리 악동이라 한들 서리 대상에서 제외했다.

아버지가 귀신의 정체를 모를 리 없다. 그 정도는 속아 넘어가 주는 아량을 가졌기에 망정이지 '그림의 떡' 보며 침만 질질 흘렸으면 이런 맛난 추억을 떠올리기나 하겠는가.

어느 날 아침 우리 아버지는 밥상 앞에서 나직이 딱 한 말씀만 하셨다.

"막둥아, 열 꼬쟁이는 남겨둬야 헌다. 지사(제사)도 모셔야 하고 차례도 지내야제."

화끈거림에 한없는 사랑에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자칫 체할 뻔했다. 하느님처럼 어린 아들의 동태를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니! 부끄럽고 죄송해서 할 말을 잊었다.

a 홀로 사시는 고향마을 시골 할머니께서 멋진 장면을 연출했다. 껍질도 없어서 못 먹었다. 싸리 꼬챙이는 벨 힘이 없도록 허리가 굽어 있었다.

홀로 사시는 고향마을 시골 할머니께서 멋진 장면을 연출했다. 껍질도 없어서 못 먹었다. 싸리 꼬챙이는 벨 힘이 없도록 허리가 굽어 있었다. ⓒ sigoli 고향

곶감 한 줄의 마력

아! 정말 나는 '곶감 빼먹듯' 뭔가를 축내고 싶다. 구미가 당긴다. 빼먹고 싶다. 아니 신주단지, 조청단지보다 더 그리운 이름, 곶감이여! 추억으로 설명하기 부족하고 고향의 맛으로 진가를 다 논하기에 부족하다. 그리운 사랑과 아름다운 전통으로 끝내기에도 미안하다.

실에 꿴 곶감은 여기에서 한참이나 세월을 빗겨갔으니 그 추억을 오롯이 물려주지 못한다. 상주, 영동, 금산은 산간내륙이라 곶감이 잘 마르는 고장이다. 몇 번 근처를 방황하다가 진짜배기 곶감 한 줄 구했다는 친구 말에 오늘도 어서 도착하기를 목 놓아 기다리고 있다.

새 시대 새 아이야 기다려라. 애비가 곧 감나무 접을 붙이고 싸리나무를 베러 갈 테다. 햇볕 두어 줌만 들어오는 처마 밑에 그대들 추억을 한 올 두 올 겹겹이 꽂아놓을 테니 걱정 말고 와서 빼먹고 침을 바르라.

중년의 아버지가 그 정도쯤이야 못하겠느냐. 동무를 데려와도 좋다만 차례상에 올리고 수정과 만들 만큼만 남겨두면 되느니라. 설사를 하거든 하나 더 먹어도 된다. 속에 든 하얀 솜 같은 부분만 버리고 먹으면 응가 나오지 않을 일도 없다는 구나. 약방에 감초이듯 겨울철 군것질거리는 곶감이야.

a 잘 마른 곶감 하나. 제사 때 조상님들은 왜 곶감을 차리라고 했을까?

잘 마른 곶감 하나. 제사 때 조상님들은 왜 곶감을 차리라고 했을까? ⓒ sigoli 고향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인터넷고향신문 시골아이 고향(www.sigoli.com)을 만들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김규환 기자는 인터넷고향신문 시골아이 고향(www.sigoli.com)을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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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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