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성욱 장편소설> 762년 - 4회

표류(漂流)

등록 2006.03.03 11:38수정 2006.03.03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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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영명은 뱃길을 떠나는 왕신복에게 수영을 배우라고 권했다. 발해는 내륙 지역에 위치해 있어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왕신복 또한 오랜 문관 생활로 수영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왕영명은 준엄하게 일렀다.

"험한 물길을 몇 달이 넘게 지나가야 한다. 도중에 무슨 일이 있을 지 모른다. 미리 수영을 배워 놓도록 하거라."


왕신복은 아버지의 명을 받아 목단강으로 가서 수영 연습을 했다. 그가 부리는 부관이 수소문해 데리고 온 어부로부터 혹독한 연습을 받은 것이다. 그리하여 목단강의 거친 물살을 가를 수 있는 수영 솜씨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수영 실력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처럼 왕신복의 아버지 왕영명(王永明)은 예지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고구려 무장이었던 왕신복의 조부는 고구려가 망하자 신라에 투항을 했고,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황금서당(黃衿誓幢)에서 종사했다. 신라에는 9개의 서당이 있었는데,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직속 부대의 중앙 군이었다. 각 서당은 옷 색깔에 따라 각기 부대를 구분하고, 거의 같은 비율의 군사로 편성되었다. 이 서당의 구성원은 신라인뿐만 아니라 백제·고구려·말갈의 유망인 들까지 포함하였는데, 이는 반란의 위험이 있는 이민족에 대한 우환을 더는 한편 중앙의 병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왕신복의 조부가 속한 황금서당은 서울을 지키는 핵심 군단이었다. 거기서 신라의 반란군과 싸우며 통일 신라의 기틀을 잡는데 큰 공헌을 한 조부는 최고지휘관 바로 밑의 대관대감(大官大監)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왕신복의 아버지 왕영명은 그 업적으로 신라의 진골 출신의 여자와 혼례를 올릴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뒷 배경이 든든해진 왕영명은 탁월한 무공으로 명주의 하서변 장군의 자리에 올랐다. 하서변은 발해와 맞닿아 있는 명주를 지키는 부대로 북쪽의 적을 방어하는 임무를 띄었다.

명주는 발해와 신라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가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거기서 왕영명은 수많은 발해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 또한 자신과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고구려가 망하고 신라에 투항하지 않았다면 자신도 발해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신라에 투항하기 전에 발해가 건국되었다면 그곳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왕영명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기 정체성으로 인해 많은 고민을 했다. 신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무장이었지만 자신의 몸 속에 의연히 흐르는 고구려의 피를 부인할 순 없었다. 그때 마침 고구려가 망한 만주 지역에 대조영이 그 세력을 넓히며 발해를 건국하고 있던 터였다. 오랜 결심 끝에 왕영명은 식구들을 불러놓고 신중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나를 키워준 나라가 신라임에는 틀림없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 온 나라가 고구려라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라가 삼한 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후 발전을 거듭하고 있을 때, 발해는 아직 틀도 잡지 못하고서 주변 이민족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신라는 나 하나쯤 없어도 상관이 없겠지만, 발해는 많은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북행을 결정하기로 했다."

왕영명의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뜻에 결사적으로 반대를 했다. 왕신복의 어머니는 신라의 진골 출신으로 성덕왕과 가까운 인척지간이었다. 그런 왕족 출신이 발해로 망명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왕영명의 뜻은 완고했다.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행을 감행했다. 친척 중 아무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왕영명은 오직 그의 아들 왕신복과 함께 명주(溟洲 지금의 강릉)를 거쳐 발해로 넘어갔다. 왕신복의 어머니는 울며 왕영명의 옷자락을 붙잡고 애원을 했다. 아들만은 남겨 놓고 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왕영명의 뜻은 완고했다. 고구려 핏줄을 이을 유일한 혈육을 신라에 남겨놓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어린 왕신복을 가슴에 품고 눈보라를 헤쳐 신라로 이어진 길을 따라 발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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