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성욱 장편소설> 762년 - 7회

표류(漂流)

등록 2006.03.08 16:06수정 2006.03.08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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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수도를 동모산(東牟山)에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기는 천도를 단행하기도 했다. 여기에 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문왕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수도를 옮기는 일은 전쟁으로 인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여러 세력의 이해가 얽히고 재정부담이 커서 실행에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신하들, 특히 무관들의 반대가 빗발쳤다. 이에 왕신복이 나서 천도의 당위성을 논리적으로 밝히며, 천도에 반대하는 무관들의 논리에 하나하나 반박을 펼쳤다. 이에 문왕은 그를 높이사 발해의 대외 관계를 넓히는 중책을 맡겼다. 왕신복은 당시 발해와 대립관계에 있던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 발해 문왕을 종전의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책봉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국왕 책봉은 확실한 독립국으로 인정함을 의미했다.


이런 공로로 왕신복은 정당성 좌윤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정당성은 정령(政令)을 행하는 최고의 행정 서무기구였다. 정당성의 장관을 대내상(大內相)이라고 하였고, 선조성과 중대성의 장관을 각각 좌상(左相), 우상(右相)이라 하였다. 이들 3성의 장관들은 국가와 군사에 관한 주요 정책사항을 심의, 결정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은 정당성에 집중되어 정당성의 좌윤의 벼슬을 받은 왕신복의 위세는 대단히 높았다. 특히 그는 왕의 신임이 높아 그와 독대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신하이기도 했다.

문왕과 은밀히 독대를 한 것이 일주일 전. 문왕은 왕신복에게 엄청난 임무를 맡기고는 이 일로 인해 신변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언질을 해주었다. 왕의 언질이 주효했을까? 왕신복은 지금 생사를 넘나들며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표류가 시작된 지 이틀이 지나고 있었다. 압도적인 정적 속에서 별들의 미미한 빛만 비치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두꺼운 구름에 뒤덮여 칠흑처럼 어두웠는데, 오늘밤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빛나고 있었다.

밤이 되자 또다시 졸음이 몰려오며 긴장의 끈이 스르르 풀어지기 시작했다. 단조로운 주위의 풍경에 시신경도 반응을 보여오고 있었다.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눈을 감았다 떠도 풍경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자고 있는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길게 심호흡을 하며 손과 발을 버둥거렸다. 눈을 들어 주위를 보니 널빤지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물살이 세차며 빠르게 떠내려갔다. 해류를 탄 것이 분명하다. 온몸으로 스치는 물살의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였다.


그는 눈을 들어 북극성을 찾았다. 멀리 왼편으로 북극성이 붙박은 듯 하늘에 박혀 있었다. 널빤지는 그 북극성을 중심으로 밑으로 향하고 있었다. 해류가 남쪽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동해에 부는 계절풍은 이미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봄에서 여름에는 주로 일본에서 발해로 바람이 불고,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는 발해 쪽에서 일본으로 계절풍이 불어간다. 그래서 선박들은 돛을 타고 이 바람을 이용해 항해를 한다. 하지만 해류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해류의 방향과 위치가 너무나 복잡하고 자주 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해류보다는 바람을 이용하여 항해를 하곤 했다.

잠시 뒤 먹장구름이 서서히 몰려와 하늘의 달과 별을 가려버렸다. 여태 지켜봐 왔던 북극성도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방향을 가늠하기가 힘들어졌다. 회색 하늘이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갔다. 검은색에 검은색을 덧칠한 듯한 암흑의 세계. 방향은커녕 주위 사물을 분간하기도 어려울 만큼 어두워졌다. 다만 스쳐 가는 물살로 자신이 지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더 흘러가자 그 물살마저 잔잔해졌다. 널빤지가 떠가는 속도가 한결 더뎌졌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그러자 여태 널빤지를 붙들고 빠른 해류에 신경을 바짝 쏟고 있던 긴장의 끈이 스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빠른 물살 속에 널빤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손아귀에 바짝 힘을 모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슬쩍 널빤지를 놓아도 흘러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바람과 파도조차 잔잔했다. 그 사이 왕신복은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하지만 온전한 잠이 되진 못했다. 한쪽 손으로 널빤지를 잡고 있어 늘 긴장하고 있는 데다, 미세한 파도가 그의 얼굴을 때리며 시시각각 깨어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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