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믿고 살지예"

지리산 칠백고지 고운동에서 8대째 살아가는 기연이네 가족

등록 2006.06.09 10:05수정 2006.06.0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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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운동에서 내려다본 고운동 계곡

고운동에서 내려다본 고운동 계곡 ⓒ 송성영

아랫녘 남도 땅임에도 불구하고 4월 중순에도 눈이 내리는 곳, 기연이네 가족은 지리산 칠백고지, 경남 산청군 시천면 반천리 고운동(고운골)에 살고 있다.


산 아래 학교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 스쿨버스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신천 초등학교 2학년인 기연이와 유치원생인 아연이는 아빠의 사륜구동 1톤 트럭을 타고 학교에 다녀야 한다. 그 대신 학교에서 교통비조로 한 달에 50만원씩 보조해주고 있다.

"애들 덕분에 냉장고까지 구입했지예."

a 교통비조로 한 달에 50만원씩을 보조 받고 학교에 다니는 기연이와 가연이 그리고 엄마, 배영수씨

교통비조로 한 달에 50만원씩을 보조 받고 학교에 다니는 기연이와 가연이 그리고 엄마, 배영수씨 ⓒ 송성영

고운동에 들어서려면 구불구불 급경사 길을 오르락내리락 해야만 한다. 눈이라도 내리면 쉽게 집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첩첩산중 외딴집에 살면서도 이창석씨네 부부는 큰 불편 없다며 환하게 웃는다.

텔레비전조차 나오지 않는 산골마을의 두 남매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쩌다 비디오를 보거나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다가 싫증이 나면 진돗개 '번개'하고 논다. 대자연이 온통 놀이터인 셈이다.

"애들 공부예? 공부 잘하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더. 중학교를 나오든 고등학교만 나오든 열등감을 갖지 않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신라 말 고운 최치원 선생이 머물렀다 하여 이름 지어진 고운동. 예로부터 지리산 어딘가에 푸른 학이 훨훨 날아다니고 신선들이 모여 산다는 이상향, 청학동이 있다고 전해져 오고 있는데 그 중 한 곳으로 손꼽는 곳이 바로 고운동이기도 하다. 청학이니 신선이니 하는 얘기들은 다 접어두고 도대체 어떻게 생긴 마을일까? 그것이 늘 궁금했다.

하지만 고운동은 예전의 고운동이 아니다. 구불구불한 협곡을 타고 오르면 탁 트인 너른 분지가 나온다는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빼어난 정취, 그 자리에 인간들의 탐욕만큼이나 거대한 양수댐이 들어서 있었다.


a 지리산 7백고지에 들어선 고운동 양수댐

지리산 7백고지에 들어선 고운동 양수댐 ⓒ 송성영

댐 공사 소문이 나돌던 90년대 초부터 전국 환경단체들의 거센 반대 운동이 있었지만 결국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아픔을 '홀로 아리랑', '개똥벌레'를 만든 한돌은 '고운동 달빛'이라는 서글픈 노래로 만들기도 했다.

고운동 계곡이 잠긴다네
고운동 달빛이 사라진다네
꽃들의 희망도 잠기겠지
새들도 말없이 떠나가겠지…


본래 고운동은 기연이네 아빠 이창석(40세)의 형제들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며 아버지가 태어났고 그 아버지에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뼈를 묻은 곳이기도 했다. 그의 선조들이 고운동에 처음 정착한 것은 2백여 년 전, 8대조 할아버지 때부터라고 한다.

그의 일가는 고운동에서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 1968년 북한의 124군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 이후 평화롭기만 했던 고운동이 무장공비들의 은신처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강제철거 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고운동 사람들의 시련은 그 이전부터 있었다. 여순반란 사건과 6·25민족 전쟁을 겪으면서 이미 수차례에 걸쳐 강제 철거를 당해야 했다.

"고운동에 사람이 많을 때는 30여 가구가 자급자족하고 살았다고 하는데예. 강제 철거당하고는 명절 때마다 선친들 묘소를 찾는 것이 전부였지예."

a 감농사와 500여평의 밭, 그리고 지리산 산채로 생활하는 기연이네 가족

감농사와 500여평의 밭, 그리고 지리산 산채로 생활하는 기연이네 가족 ⓒ 송성영

현재 고운동에는 종교시설 등을 제외하고 가정을 일구고 사는 집안은 3가구가 전부다. 그 중에서 고운동에서 대를 이어 살아가는 집안은 기연이네 가족이 유일하다.

지금은 도로가 뚫려 쉽게 마을을 오갈 수 있지만 도로가 생기기 이전에는 산 아래 마을 반천리까지 십오 리 산길을 걸어다녀야 했다. 그의 맏형인 이도정씨(그 역시 부산에서 벌이고 있는 사업을 접어 두고 조만간 고향으로 돌아올 예정이라고 한다)는 마을이 철거되기 이전까지 고운동에서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a 고운동 계곡에 자리한 거목, 참나무 앞에서 선 이창석. 이도정 형제.

고운동 계곡에 자리한 거목, 참나무 앞에서 선 이창석. 이도정 형제. ⓒ 송성영

"내가 어렸을 때는 10여 가구가 살았는데 국민학교 3학년 때까지 여기서 학교를 다녔지예, 일 년에 석 달 정도는 결석해야 했습니더. 비가 오면 계곡물이 불어 길이 끊기고 눈이 오면 길이 막혔으니까예. 학교 다니기가 힘들어 산 아랫마을 고모집이나 아는 사람들 집을 전전하며 동가숙 서가식 하면서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토요일이 되면 고운동으로 올라오곤 했지예."

그 어려움 속에서도 이창석씨네 3형제는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부산대학교를 나왔다. 부산 상대를 나온 이창석씨는 한동안 서울 고시촌에서 고시공부를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지 10년째.

"산이 좋다기보다는 도시 생활이 맞지 않았지예."

그는 고향에 돌아온 지 1년 만에 여동생 친구인 배영수씨를 만나 결혼을 했고 두 남매를 두었다. 날렵한 몸매에 강렬한 눈빛 하나만으로도 그는 분명 산을 떠나서는 살수 없을 것 같은 산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산사람임을 내세우지 않는다.

눈빛 맑은 그의 아내 배영수(35세)씨는 참 별난 사람이다. 결혼할 무렵 산골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이창석씨하고 결혼하겠다는 생각만 했지 산골생활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살다보니 산골이 저절로 좋아진 것이지예. 고사리 같은 산채를 뜯으러 다니는 일은 좋아하지만 밭일에는 취미가 없습니다."

그녀는 결혼 전까지 산골 생활, 그것도 산간오지 외딴집 생활하고는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일을 했다. 대학에서 비서학과를 전공하고 형부가 다니는 호텔에서 돈을 관리하는 캐셔 일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서울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용인 에버랜드까지는 가봤지만 서울은 못가 봤습니다. 서울 갈 일이 없었지예. 그래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서울에 가보지 않았다고 불편한 것도 없구예. 얼마 전에 결혼기념일이라 해서 결혼하고 8년 만에 첨으로 애 아빠하고 극장엘 갔는데 얼떨떨 하더라구예. 그렇다고 도시로 나갈 생각은 없어예, 여기서 사는 게 훨 낫지예."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해왔던 이창석씨. 고향에 내려와 농사일을 시작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그는 가끔씩 트럭을 이용해 돌을 날라 주거나 목수 일로 일당벌이를 하기도 한다. 목수 일을 하면서 배운 솜씨를 발휘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을 개간했다.

a 기연이네 집 벽에 걸린 농기구들

기연이네 집 벽에 걸린 농기구들 ⓒ 송성영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한옥에 황토 집을 짓고 정자까지 세웠다. 주변 환경을 훼손시키지 않고 가옥을 들어 앉혔고 본래 있던 계곡을 이용해 자연 못을 만들고 가능한 나무들을 다치지 않게 정원을 꾸몄다. 바윗돌 무성한 척박한 땅을 개간해 5백 평이 넘는 밭을 일궜다. 거기서 나온 크고 작은 돌들은 보기 좋게 밭 가장자리를 둘렀다.

여태까지 그 흔한 핸드폰 하나 장만하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 부부의 생활 방식은 소박하다. 집주변에서는 비닐봉지 하나 눈에 뜨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친환경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대소변을 가려 만든 재래식 화장실 역시 친환경적이다. 옛 변소간이 그러했듯이 오줌은 물론이고 똥은 아궁이에서 나온 재를 섞어 밭 거름으로 되돌려 놓고 있다.

이들 부부는 한시라도 일손을 놓지 않는다. 감나무를 돌보거나 밭일을 하지 않으면 산에 올라가 약초며 산채를 구하러 나선다. 주말이면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들 접대에 분주하다. 대대로 불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육고기를 거의 먹지 않기 때문에 손님들의 밥상에도 산채와 야채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생활비는 어떻게 감당할까? 500 평 정도의 밭에서 나는 농산물과 산채로는 도저히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보였다.

"봄에는 고로쇠 물을 받아 주변사람들에게 내다 팔고 부모님이 사시는 산 아랫마을에서 곶감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는데 어렵지예. 감 농사가 가장 큰 수입원인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자칫 냉해나 병해를 입으면 한 해 농사 끝장이니까예. 그래서 하늘을 믿고 살 수밖에 없습니더."

지 아무리 첩첩 산중 고운동 골짜기에 댐이 들어서고 도로가 뚫려 자동차들이 사람의 발을 대신한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속세와 단절된 깊은 산중에서 논밭을 일구며 살았던 그의 조상들처럼 그 역시 하늘을 의지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벼슬은 많이 할수록 민폐를 끼친다.'

정 3 품의 벼슬자리를 버리고 지리산 고운동에 정착했다는 그의 8대조 할아버지가 자손들에게 남긴 말이라고 한다. 벼슬은 크게 할수록 큰 도둑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200여 년 전 모든 것을 훌훌 벗어 던져 버리고 고운동에 정착했다는 그의 선조가 그러했듯이 화려한 도시의 삶을 등지고 소박한 삶을 선택한 이창석씨 부부.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만의 이상향을 찾아 나가고 있었다. 그랬다. 지리산에 있다는 이상향은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불교와 문화' 6월호에 보낸 원고를 수정한 기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불교와 문화' 6월호에 보낸 원고를 수정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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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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