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싫어하는 아이에게 빗방울이 말해준 것

이 비 그치면 나를 햇살에 널어 말리고 싶다

등록 2006.07.06 13:35수정 2006.07.06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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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준철

본격적인 장마철로 접어들다 보니 우산을 들고 출근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우산을 펴들고 걷다보면 그렇지 않아도 출근길을 산책길로 아는 제 걸음걸이가 갑절은 더 느려터집니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은 아예 천천히 걸어갈 요량으로 일이십 분 먼저 집을 나서기도 합니다. 자꾸만 해찰을 하다보면 걸어서 십 분이면 족할 거리가 이십 분도 넘게 걸리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비를 좋아한다기보다는 모든 자연물을 다 좋아합니다. 따사로운 햇살과 산들바람과 하얀 눈송이와 떨어져 뒹구는 낙엽을 미치도록 좋아합니다. 하늘이 거저 주신 것이니 미치도록 좋아한다고 비용이 더 드는 것도 아닙니다.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날 필요도 없이 매일 같이 걸어서 오가는 길에 마주치는 것들이니 더욱 그러하지요. 빗속을 거닐다가 이런 알량한 시라도 한 수 줍게 되면 더더욱 그렇고요.

비 온 뒤
세상 조촐한 것들이
잎새마다 빗방울 하나씩 달고
눈부셔 하고 있다.

길 모서리, 혹은
돌 틈새에서 자란
세상 보잘것없는 것들이
흔하디흔한 빗방울 하나에
온 몸을 반짝이고 있다.

혼자서는 쥐뿔도 빛날 게 없어
서로 서로 눈부셔 하고 있다.

-자작시, '세상 조촐한 것들이'


엊그제 우산을 받고 출근하는 길에 한 아이를 만났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 표정이 어딘지 짜증스러워보였습니다. 잠시 후, 우리 둘 사이에 이런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기분이 어째 안 좋아 보인다."
"비가 오는 날은 기분이 좀 그래요."
"그래? 난 비 오는 날이 좋은데…."
"비가 오면 옷도 젖고 그래서 싫어요. 습기가 많아서 기분도 찝찝하고요."
"기분이 찝찝하면 너만 손해니까 나처럼 비하고 한 번 친해봐."
"손해를 봐도 좋아요. 비하고는 친하고 싶지 않아요."

요즘 아이들이 이렇습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찬바람이 쌩쌩 불지요. 하지만 아이들 특유의 솔직함이 장점이 되기도 합니다. 일단 감추는 것이 없으니 그 아이의 성정이나 마음의 상태를 제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제대로 알아야 도와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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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준철

점심시간에 그 아이를 또 만났습니다. 세차게 내리던 굵은 비는 그치고 안개비가 가늘게 내리고 있는 교정에서 우산을 손에 든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고 있는 저를 보고 아이가 반갑게 아는 체를 한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 또 이런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선생님, 뭐하세요?"
"응, 사진 찍고 있어."
"비 오는데 무슨 사진을 찍으세요?"
"여기 봐, 이 풀잎에 맺힌 빗방울들 말이야. 무지 예쁘지?"
"어디요?"
"여기 말이야. 이렇게 비스듬히 봐야 환히 보이거든."
"와! 정말 예쁘네요."

"그런데 말이야. 참 이상하지 않니?"
"뭐가요?"
"이 빗방울들 말이야. 지금 비가 오고 있는데도 환히 빛나고 있잖아. 햇살도 없는데 말이지."
"정말 그러네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햇살이 없는 것도 아니야. 비가 와서 날이 좀 흐릴 뿐이지 아직 밤이 온 것은 아니니까. 그치?"
"예. 맞아요."
"난 이 빗방울들이 참 긍정적인 태도를 가졌다고 생각해."
"그건 왜요?"
"세상의 흐린 빛들을 다 모아다가 이렇게 눈부신 빛으로 바꿔놓았잖아?"
"와, 정말이네요!"

그날 저는 아이에게, 그러니 너도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식의 얘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빗방울이 저 대신 아이에게 그 말을 해준 뒤였으니까요. 다만, 저는 그날 학교가 파하기 전에 시 한 편을 출력하여 아이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비록 오래 전에 쓴 시지만 그날 있었던 일들을 오래 기억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흔한 광경이라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비 오시는 날
풀잎에 어린 작은 물방울들

이 습한 날에
어디서 빛들을 모아
저리도 눈부실 수 있는지

저 긍정의 눈빛들!

-자작시, '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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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준철

'잠재적 교육과정'이란 교육학 용어가 있습니다. 학교에서 교육계획을 수립하여 실시하는 형식적인 교육과정과 대별되는 개념이지요. 가령, 오늘 점심시간 그 아이와 나눈 대화를 잠재적 교육과정의 일환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 대화 이전에 자연이 저와 아이에게 준 선물, 곧 비와 풀잎과 햇살 등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말입니다.

좋은 교육은 교과서나 참고서를 통해 가르치고 배우는 지식만이 아니라는 것을 저도 오늘 새삼스럽게 마음에 다시금 새기게 되었습니다. 저도 자연이라는 큰 스승으로부터 그런 좋은 교육을 받은 덕분에 티끌만큼이나마 사람 구실을 하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아직 축축하고 냄새나는 구석이 많을 터이니, 이 비 그치면 쨍쨍한 여름 햇살과 싱그러운 산들바람에 나를 널어 말리고 싶습니다.

어느 시인이
비가 오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세상을 빨래하는 중이라고

또 그 시인이
비가 그친 뒤 햇살이 비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세상을 널어 말리는 중이라고

비가 오면
나는 나를 빨래하고 싶다
비가 그친 뒤
나를 햇살에 널어 말리고 싶다

그리하여
비 오시는 날
하나님이 세상을 빨래하여
햇살에 널어 말리는 것을 보고 싶다.

- 자작시, '비 오시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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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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