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9회

등록 2006.08.25 08:22수정 2006.08.25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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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仲醫) 공손정(公孫靜).
동정오우 중 한 인물. 의술(醫術)과 독술(毒術)에 있어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다. 그가 존재 했기에 동정오우는 중원을 품에 안을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리 고수라 하더라도 많은 싸움 속에 멀쩡할 수는 없는 일. 그가 친구들의 뒷바라지 뿐 아니라 치명적인 독으로 상대를 무력화 시켰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내일 오전에 당도하신다는 전갈이 왔소."


"그럼 내가 마셔볼 필요도 없겠군."

그의 말뜻은 명백했다. 차 주자에 있는 찻물을 마셔볼 생각이었다는 의미였다. 이미 나흘이나 지난 찻물을 마신다는 것은 웬만한 비위를 가지고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다시 철담의 시신과 맞은편을 살폈다. 의자가 빼내져 있었다. 누군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는 의미였다. 더구나 왼쪽의 의자는 서탁 밑에 밀어 넣어진 것에 반해 철담의 시신 오른쪽 의자는 빼내져 있어 마치 세 사람이 앉아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까 세 분이 이곳에 오셨다가 갔다고 했는데 세분이 이곳에서 같이 계신 적이 있었소? 그러니까 보주께서 오셨고, 그 뒤 회운사태가 들렀다고 했는데 이곳에 같이 계셨소?"

좌등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오. 세 분 모두 혼자 오셨다가 가셨고, 이 방에 세 분이 계신 적은 없었을 것이오."


좌등 역시 풍철한의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오른쪽 의자에 누군가 앉은 흔적이 있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풍철한은 오른쪽 의자 위에 놓인 방석을 자세히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누군가가 앉은 흔적이 있었다. 그 이전에 들어와 무언가 뒤진 인물들이 만든 흔적이 아니라면 분명 맞은편뿐 아니라 우측에도 누군가 앉았다는 결론이었다.

'따로 있었다 해도 회운사태라면 아직 배분이나 나이로 보아 맞은편이 아닌 옆으로 비껴 앉을 수도 있겠군. 헌데 철담어른이 왜 회운사태를 불렀던 거지?'


의혹은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더구나 찻잔은 두 개 뿐이었는데 의자가 세 개라면 한 사람에게는 차를 대접하지 않았던 것일까? 회운사태가 오른쪽 의자에 비껴 앉았다면 왜 철담은 회운사태에게 차를 대접하지 않은 것일까? 역시 마찬가지로 성곤에게도 아예 차를 권하지 않은 것일까?

누구든 자신의 거처를 찾아온 사람에게는 차를 대접하는 것은 대화를 하는 것만큼 의례적인 일이었다. 그럼에도 회운사태나 성곤에게 차를 대접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함곡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재차 철담의 시신을 살피다 중얼거렸다.

"흉수는 철담 어른과 맞은편에 앉아 있었어. 철담 어른은 상대의 움직임에 서탁을 뒤집어 엎으면서 출수하려 한 것이지."

철담의 왼쪽 손은 서탁의 다리를 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똑바로 앉아 있다가 당한 후에 오른쪽으로 약간 기운 것이다. 순간 철담의 왼쪽 손을 보던 두 사람이 일순 상대를 보았다. 풍철한과 함곡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반지겠지?"

"그런 것 같군."

그들의 시선은 다시 희미한 선이 그어져 있는 철담의 왼손 약지를 향했다. 오랫동안 반지를 끼었다 빼면 나타나는 흔적이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약지를 자세히 보기 위해 머리를 들이댔다. 함곡이 나직하게 말했다.

"누군가 죽은 후에 빼 간 것 같군."

철담의 왼손 손가락 사이에는 기름으로 보이는 액체가 언뜻 보였다. 누군가 기름을 묻혀 반지를 빼간 후 닦은 것 같았는데 손가락 사이는 미처 세심하게 닦지 않은 것 같았다.

"확실히 죽은 후에 빼내갔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풍철한이 중얼거렸다. 그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있어 마치 나직하게 소곤거리는 것 같았다. 풍철한이 약지의 두 번째 마디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무언가 긁힌 듯한 상처가 나 있었는데 피는 배어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이것은 분명 살아 있을 때 반지를 빼낸 것이 아니고 죽은 후에 반지를 빼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보주가 허락한 인물들만 이곳에 왔다 갔다고 했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뒤였다. 좌등은 조금 전 없어진 물건이 없다고 말했지만 이미 철담의 약지는 반지가 없어졌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에 왔다 간 사람들 중 흉수가 없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더구나 이곳 정황으로 보아 철담과 잘 아는 사람이 흉수였다. 하지만 풍철한과 함곡은 좌등에게 누가 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어차피 필요하다면 나중에도 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묻지 않고 반지의 소재를 찾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굽혔던 허리를 펴며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사라진 것은 반지 말고도 또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이 결정적 단서를 제공할 것인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좌등을 추궁하더라도 모를게 뻔했다.

일단 지금의 상태만이라도 뇌리에 각인시키는 것이 중요했다. 이 상태에서 없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흉수와 관계된 일일 것이다. 함곡이 예리한 눈빛으로 주위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갑자기 풍철한이 하품을 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너무나 분명해. 너무나 명백하지."

불쑥 풍철한이 내뱉는 말에 좌중은 모두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흉수 말인가?"

"물론이지. 이 모든 것이 흉수가 누군지 명백하게 밝혀 주고 있지 않나?"

"성급한 결론은 왕왕 치명적인 오판을 가져오게 한다네."

"보주야. 보주가 아니라면…."

그 순간이었다. 문 쪽에 서 있던 무적신창 좌등의 몸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붉은색의 창대에 금빛 휘황한 창촉을 가진 무적신창이 들려 있었고, 그것은 어느새 풍철한의 목젖에 닿아 있었다.

"보주께 무례한 자는 죽는다!"

한 순간 장내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금빛 창끝에서 방울방울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한 치만 더 파고든다면 풍철한의 숨통은 그대로 관통될 것이다. 풍철한의 얼굴이 굳어지며 굵은 검미가 꿈틀했다.

"좌선배! 당신이 보주께 충성하는 마음이야 알지만 당신들이 모셔온 손님에게 창끝을 댄다? 더구나 상처까지?"

풍철한의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그는 화가 치민 것 같았다. 짧은 턱수염이 빳빳하게 곤두서는 게 보였다. 좌등 역시 노기를 띠며 대답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실내의 공기를 정지시킨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보주께서 청한 손님이라도 네 놈처럼 무례한 자에게 예의를 지킬 필요는 없지."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고집스럽기는 두 사람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인물. 두 사람 몸에서 엄청난 기세가 무언 중 격돌하고 있었다.

"무적신창께서는 잠시 노기를 거두시지요."

보다 못한 함곡이 말리려 나서자 풍철한의 얼굴에 노기와 함께 냉기가 감돌았다.

"자네는 가만 좀 있어. 이건 내 일이야."

그는 고함을 질렀다. 그의 고함에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노기가 서려 있었다. 화풀이를 함곡에게 하는 것 같았다. 아직 창끝은 그의 목젖에 닿아 있지만 그의 기세는 더욱 사납게 변했다.

"한판 붙어 보자는 거요? 그 동안 좌선배의 창술이 신기에 달했다는 말을 귀 따갑게 들었소. 하지만 나 역시 길지 않은 삶을 살아오면서 나를 모욕한 자를 가만두지 않았소."

지금껏 보이던 장난스런 표정이 걷히자 광검 풍철한의 진면목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제멋대로 중원을 누비며 사는 호한(好漢).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장난기가 많은 인물이 화를 내자 다른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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