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37회

등록 2006.09.20 08:15수정 2006.09.20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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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것은 침상 바로 앞에 탁자 의자가 한 개 놓여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마 서교민이 죽어있던 그 탁자의 의자 다섯 개 중 하나였던 모양인데 그것이 침상 옆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가 침상에 앉아 있었고, 또 다른 사람이 바로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했다.

'왜 여기에 의자가 놓여져 있는 것일까? 분명 침상에 누군가 있었고, 또 다른 인물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대화라도 나누었던 것일까? 하지만 대화를 나눈다 해도 왜 탁자가 아닌 침상에서 의자를 가져다놓고 대화를 나눈 것일까? 뭔가 비밀스런 말을 나누기 위함이었을까?

'그렇다면 상대는 서당두와 잘 아는 사이였던가?'

외부에서 침입한 것으로 보이는 흉수와 비밀스런 말을 나눌 정도로 잘 알고 있는 사이였다는 추측이 가능하긴 했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자신을 죽일 생각을 가지고 창문을 넘어 들어온 자와 은밀한 대화를 나눌 정도의 사이였다면 동창에서는 서교민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서교민의 사인이 된 그 흔적은 이미 사라진지도 오래되었지만 동창과 어울리지 않는 무공이었기 때문이었다.

경후는 다시 침상과 의자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피다가 부드러운 천에서 풀려나온 것 같은 실오라기 몇 개를 발견했다. 옷이나 이불, 침상의 천을 찢다보면 찢어지는 부분에서 풀려나올 수 있는 실오라기였는데 그 재질은 아주 고급스런 명주(明紬)여서 이불이나 침상을 덮는 천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투다가 옷이 찢어진 것일까?'


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이곳에서 다툰 흔적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려 쓰러져 있는 서교민을 보았으나 옷이 찢어진 흔적은 보이지도 않았고 또한 재질 역시 다른 것 같았다. 경후는 자신의 뒤만 조용하게 따라다니고 있던 용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용추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고, 말도 하지 않았다.

경후는 무언가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어지럽게 들리며 열려진 문으로 여러 사람들이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바로 운중보주 일행이었다.


"보주께 심려를 끼치게 되어 죄송하외다."

뜻밖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운중보주를 탓하는 말을 하였을 것이었다. 명백하게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은근히 운중보의 책임으로 돌렸을 터였다. 하지만 신태감은 오히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자신들의 책임인 양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신태감의 무서운 점이었다. 상대로 하여금 예측할 수 없는 태도를 보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교묘한 재주라 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을… 오히려 태감 볼 면목이 없구먼."

운중보주가 신태감의 속내를 짐작 못할 바 아니었다. 다만 신태감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뭔가 짐작가시는 바라도 있으신가?"

"아직은… 하지만 경첩형(卿貼刑)은 이런 쪽의 전문가이니 곧 밝혀낼 수 있을 거외다."

그의 의도가 나타났다. 이 사건에 대해 자신들이 조사하겠다는 의미였다. 신태감은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려 운중보주 일행 쪽으로 다가온 경후를 보았다.

"인사드리시게. 운중보주이시네."

경후가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머리를 숙였다.

"경후라 하오. 만인이 존경하는 보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이외다."

첩형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경후는 최대한 정중하게 운중보주에게 예를 취했다.

"반갑네. 신태감께서 자네를 칭찬하는 말을 많이 들었지."

동창의 첩형을 앞에 두고 초면에 하대하는 일은 확실히 기이한 일이었다. 풍철한은 도대체 이들 관계가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무림제일인이라 하지만 아무런 관직도 없는 운중보주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조신들이라도 겁을 내는 동창의 첩형에게 하대라니…?

하기야 그를 부리는 신태감에게도 하대하고 있는 실정이니 하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운중보주에게 다른 신분이 있거나, 신태감과 특별한 친분관계가 있지 않는다면 특별한 경우에 속하는 일이었다.

"과찬이시오."

"그래… 뭐라도 찾으신 건가?"

경후는 잠시 입을 열지 않고 신태감을 힐끗 보았다. 그것은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확실하게 태도를 결정해 달라는 의미였다. 신태감이 고개를 끄떡이며 물었다.

"자네가 보기에는 흉수가 우리 내부에 있는 자라 보이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침입한 자라고 생각하는가?"

경후는 신태감이 말한 의미를 알았다. 내부인이라면 자신들이 주관해 조사할 것이고, 외부인이라면 운중보에게 이 사건을 넘기겠다는 의미였다.

"두 가지 모두 가능성이 있소이다. 더구나 흉수가 사용한 무공이 너무나 괴이해서.. 성급히 결론을 낼 수가…."

경후가 말끝을 흐리며 죽은 서교민을 바라보자 좌중은 일제히 죽어있는 시신 곁으로 다가 갔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은 처음 신태감과 경후가 보였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경악과 충격, 그리고 짙은 의혹이었다.

"독룡아(毒龍牙)!"

옥기룡의 입에서 침음성과도 같은 한마디가 새어 나오자 좌중의 인물들의 얼굴은 더욱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운중보주의 눈에도 처음으로 흔들림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 무공의 무서움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타나지 못할 무공이었다.

저것이 나타났다면 과거 어느 시점에서 십여 년이 넘도록 치열한 혈투를 벌였던 그 위기가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십여 년이 넘는 혈투로 얻은 동정오우의 명성은 다시 그 입장을 바꾸어 도전받게 될 것이었다. 더구나 저 무공은 이미 완전하게 사라졌다고 믿었고, 다시 나타났다면 그와 친구가 한 커다란 실수로 인해 무림에 다시 파란이 일게 될 것이 분명했다.

장문위는 서교민의 시신 가까이 다가가서 세세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직접 본 바는 없었지만 분명 사부가 말한 그 무공이 틀림없었다. 과거 저것이 사라진 이후 두 번에 걸쳐 나타나 운중보를 긴장시켰던 조작된 흔적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사부를 바라보았다.

"사부님… 이것은…."

장문위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운중보주의 고개가 끄떡여졌다.

"맞다. 과거 구룡(九龍) 중 독룡(毒龍)의 독룡조(毒龍爪)에 당한 상처다. 더구나 흔적으로 보아 이미 구성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보이는구나."

그의 말투는 이미 평상시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마치 자신과 상관이 없는 듯한 태도까지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독룡조의 흔적이 진짜라면 가장 심각해야 할 인물이 바로 운중보주였다. 전설적인 구룡의 신화를 밟고 우뚝 선 이가 바로 동정오우였고, 그 영광을 가져 온 이가 바로 운중보주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장문위의 말을 세세하게 확인해 주고 있었다. 지금 그가 보이고 있는 태도는 좌중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그가 그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태산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더구나 내막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지만 저 무공이 나타나면 보주를 비롯 동정오우가 십칠 년 간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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